8.06.2013

But then


어떤 의미에서 게을러 진 것도 맞지만 더 맞게는 말을 다루는 방법을 많이 잊어버렸기 때문이다. 문장을 써내기가 어렵고 이따금씩 굵직한 단어들이 생각났다가 곧이어 사라진다. 일단 써야지만 생각이 이어지는 불편함이 있는 사람이라 생각들이 줄창 점만 찍고 있지 선이 되는 경우가 드물다. 이런게 쌓이다 보면 어느 순간 걷잡을 수 없는 답답함이 치밀어 오른다.

창가 옆에 그럴 듯한 작업 공간을 새로 마련했다. 안그래도 내 공간은 위험할 정도로 많이 좋아해 스스로 문제 삼을까 하는데, 이건. 아찔하다. 도통 밖에 나갈 생각을 안한다. 특히 이런 흐린 날에 이렇게 창가에 딱 붙어, 세상에서 가장 편한 자세로 앉아, 좋아하는 음악과 바깥의 흰색 소음을 배경삼아 키보드를 두드리는 작업을 하는 것이 나는 너무 좋다. 하늘은 한 두어 시간 전부터 부릉부릉 시동만 걸고 막상 비를 뿌리고 있진 않지만 이른 밤처럼 어둡고 여름은 습하고 에어콘 실외기 작업을 하는 인부들은 바깥에서 바쁘다. 어젠 어린 시절 생각이 나 일부러 진짜 향을 피우는 모기향을 사가지고 와 창가에 놓았다. 아직 샤워를 안했지만 나는 아침부터 살아있다고 느낀다. 이 모든걸 가능하게 하는, 매일 아침 전쟁을 치루지 않아도 되는 일을 가져서 나는 새삼 다시 감사하다.

사진은 지난 토요일 이태원의 우드스탁에서 찍은 것이다. 기대가 전혀 없어서였는지 몰라도 House of Cards 사운드트랙에 딱 어울릴만한 그런 칠 아웃이나 라운지, 일렉트로니카류에 가까운 록이어서 즐겁게 취했다. 그러다 라이브 음악과 House of Cards의 연상작용으로 생각나게 된 M에게 그자리에서 반가운 이메일을 보내고 반가운 답장을 받았다. 한국에서의 마지막 날, 작별 선물을 준비해주지 않아 내심 꺼려하며 깨끗하지 않은 녹사평 주변을 같이 걷다가 즉흥연주처럼 What the Book에 쑥 들어가 Infinite Jest 첫장에 젊음 (청춘이란 말이 어쩐지 이젠 쑥스럽다) 을 담아 선물해줬던 것은 정말 재밌고 뿌듯한 일이었다. 그 한 짐 되는 책을 들고 여러 국경을 넘어다니며 폴란드와 독일 사이 어디쯤 버스에서 마지막 장을 덮는 동안 무수한 일이 일어났다. 그것은 곧 책으로 쓰여질 모양이지만 나는 궁금하다. 여기 이 창가에 그대로 바짝 붙어 앉아 나는 궁금하다.

엊그제 일요일에는 <A Late Quartet>을 봤다. 미리 Y로부터 귀뜀을 받아 마지막 씬에 대해서는 각오 비스무리한 걸 하고 있었지만 그렇지 않아도 나는 여러 랜덤해 보이는 장면에서 울었다. 괜히 운 건 아니고 이유가 있을 텐데 그 얘기를 좀 쓰고 싶지만 나는 이제 일어나 샤워해야 할 책임이 있다. 그건 여러면에서 다행스럽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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