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젯밤 잠들기 전 메모를 해놓았더랬다. 오늘 아침 일어나자 마자 볼 수 있도록. 그리하여 대체로 주말 아침에 눈을 뜨면 밀려오는 막연함에 몇시간이고 드러누워 허우적대지 않도록.
평소 주말 아침보다 세시간 정도 일찍 샤워를 하고 이런 저런 과자부스러기를 챙겨 커피를 마시러 나갔다. 귀족적인 스타벅스에는 세 시간정도 앉아있으면서 책 두권을 번갈아 가며 읽어댔다.
늦은 점심을 하러 집에 오면서 롯데에 들러 떨어진 샴푸와 계란을 사기로 한다. 오른손에는 가늘고 힘없이 쳐지는 모발을 위해 특수제조된 것처럼 광고하는 샴푸를 들고 왼쪽 어깨는 가방, 왼손은 요령껏 계란 10구와 지갑, 커피를 다 들고 있으면서 방금 받은 영수증에 샴푸값이 반밖에 안찍힌 것에 어리둥절하던 참에 마침 에스컬레이터 앞에서 막 나눠주고 있는 쿠폰을 샴푸가 들린 오른손으로 받아들고 이건 무슨 쿠폰인가 보고 있는 참으로 엉거주춤한 상태에서 어디선가 나타나 앞을 가로막는 사람.
"뭐 좀 물어봐도 돼요?"
"('아, 화장품 쿠폰이군') ..네"
"연락처 좀 물어봐도 돼요?"
"(쳐다보다) 아뇨"
"왜요?"
"(눈도 깜빡이지 않고) 남자친구 있어요"
라고 항시 대기중인 거짓말을 한다.
근 두달 가까이 내가 연애를 하려나 싶었다. 연애 대상이 좀처럼 확실해지지 않으면서 점점 어떤 긴장이나 흥미가 시들해지고 다시 습관적으로 피하기 내지는 둘러대기 모드로 진입해버린 듯 싶지만. 뒤돌아보면, 혼자 있을 때는 왠지 누군가와 같이 있어야 할 것 같고 누군가와 같이 있을 때는 왠지 혼자 있고 싶고 그렇게 언제든 부족하게 살고 있는 것 같다가 어느 때부터는 혼자 있을 때는 별 생각이 없고 누군가와 같이 있을 때는 혼자 있고 싶은, 아무래도 혼자 있는 때가 가장 나다운 것 같아, 그게 더 편하고 좋은게 아니겠느냐는 단계 비슷한 것으로 접어들면서 연애 감정 비스무리한 것이라도 좀 거추장스럽고 귀찮게 느껴지는 것이 재차 확인되고 있다. 소위 '위험한' 궤도에 들어섰다고 사람들은 말할까.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나는 엊그제 명동의 한 후진 (그러므로 대화하기엔 적당한) 커피숍에서 Milton의 Lycidas를 통째로 외워서 읊는, James Merrill을 가장 좋아한다는, 외로웠던 청년과 섹스, 마약, 중독, 욕망, 상처, 고통, 종교, 기독교, 희망, 구원, 문학, 예술, 영혼, 영원 등등 온갖 주제를 막론하고 아무렇게나 뻗어나가는 대화를 장시간 나눴는데 후에 내가 그보다 여섯 살이나 더 많은 것을 알고는 적잖이 충격을 받은 모양이다. 하하하. 그런 것은 좀 웃기기도 하지만 어색함이 더 크다. 어색함은 전염성이 큰 데다가, 어색함을 무마하려는 것도 어색하고 솔직하게 어색하고 마는 것도 어색하여 난감한 그런 것이 있다. 이것은 그냥 갑자기 생각 난 것이고, 쓰고 싶었던 말은:
남자들은 헷갈리게 용감하고 아무때나 비겁하다.
물론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생각이다. 바뀌면 바뀔수록 좋은 생각이기도 하다.
다만, 헛되지 않은 것, 헛되지 않은 것에 절박하게 매달릴지어다.
어쨌거나 이제 강남에 갈 시간이다.
Brad Mehldau - Rückblic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