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0.2012

Long Shot




2009 Kentucky Derby, Mine That Bird. 경기 중간까지 다른 말들에 비해 너무 차이나게 뒤쳐져서 화면에도 잘 안잡힌다. 하나 둘 앞질러 나오는 동안에도 해설자는 이 무명의 말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고 한참 뒤에서야 제대로 이름을 불러준다. 

역전 자체보다도 이 세계에 속한 이런 의외성과 예측불가능함이 좋다. 랜덤하다고 할 수는 없는, predictably unpredictable한 근원적인 질서가 정의의 영역을 넘어, 긴장과 기대의 연속을 가능하게 하는지도 모르겠다. 

경주해서 이겨먹자는 게 아니라. 끝을 봐야 안다고. (이것은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얘기와는 한참 다른 것이다). 특히 우리네 것은, 온갖 있을 수 있는 인간의 감정을 만들어내고 쏟아내고 하는 동안, 그 판가름되는 끝이 오늘 밤인지 내일인지 50년 후인지 정말 알 수 없다는 것이, 또 한참을 열심히 달리는데 알고보면 거꾸로 달리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는 등의, 말들의 경주와는 사뭇 다른 많은 변수들이, 진귀하고 복잡하고 말도안되고 이해불가한 스토리들을 끊임없이 만들어낸다.  

아이고. 재미있을 수 있는 당연한 것을 또 지루하게 말해버렸네.

7.09.2012

And So They Say We've Moved



W의 Woo Bar를 연상케하는, 자근자근 라운지 음악만 깔면 바로 파티장으로 돌변할 듯한 이 '미래지향적' 사무실은. 희한한 형광물감을 칠해놓은 것 같은 물고기도, 바라만보아도 크게 배고파질 없게 하는 팬트리도, 바닥과 천장에서 공간을 구분짓는 원 지름이 달라 재미없게 생기지 않은 통유리의 동글동글 미팅룸들도. 종로, 을지로 일대가 훤히 내려다 보이는 이십 팔층에서의 전망도, 아직 아름답다,기 보다는 비싸보인다, 외에 어떤 느낌인지 잘 모르겠다. 

굳이 인간미를 찾겠다면, 이 번쩍번쩍하고 바깥이 빵 트인 마천루, 초현대, 친환경, 에너지 절약형 등의 좋다는 형용사를 다 거느리는 빌딩의 입구 좌측에 놓인 그랜드 피아노에서 '우아하다고 생각해주세요!'라고 끊임없이 소리치는 듯한 의상 차림의 여자가 하이힐을 신고 아르페지오로 흐느적거리는 가요를 연주케 하는, 치명적인 미학적 판단 오류에서의 불완전성, 의도치 않은 코믹한 효과에서 고개를 끄덕일 수 있겠다. 오, 다행이라고 -

피곤하다. 형태를 알아볼 수 없는 희뿌연 것들이 자꾸 웅성웅성댄다. 
    

7.08.2012

un été invincible

A Wheatfield on a Summer's Afternoon
Marc Chagall



















mix지만 여전히 10년 정도 묵은 라이브러리에서 랜덤하게 꺼내왔을 뿐이지 새로운 곡들은 없다.  

+ BWV 889 Prelude & Fugue No. 20 in Minor: Prelude - Tureck Rosalyn
+ The First Circle - Pat Metheny Group
+ Je te veux - Erick Satie
+ Summer Wind - Madeleine Peyroux
+ Summer Day - Pat Metheny & Brad Mehldau
+ Falla: La vida Breve - Spanish Dance #1 - Gabriela Montero
+ Heartbeat - Wolfgang Haffner
+ Au Lait - Pat Metheny Group
+ Here's To Life - Stefano Bollani
+ Howl's Moving Castle - Giovanni Mirabassi
+ Answer Me, My Love - Joni Mitchell
+ Bewitched, Bothered and Bewildered - Brad Mehldau
+ My Broken Heart - Giovanni Mirabassi
+ Track 12 - Various Artists (?)
+ Song-Song - Brad Mehldau
+ Sem Aviso - Maria Rita
+ Summertime - Jim Hall & Pat Metheny
+ Konbanwa - Julia Hülsmann Trio
+ Bach BWV 1009: 4 Sarabande - Mstislav Rostropovich
+ Bittersweet Symphony - Brad Mehldau
+ Summer Night - Keith Jarrett
+ Montero: Song for Natalia & Isabella - Gabriela Montero
+ My Wild Irish Rose - Keith Jarrett
+ Track 04 - Various Artists (?)
+ For Nenette - Eliane Elias
+ Ny Snow Globe - Rachel's 
+ Another Autumn - Danielo Perez


7.07.2012

A Summer Evening


photo by Brian Ferry

완전히 기분에 의존하는 나의 운동량은 실로 가난하다. 오늘은 기분이 그러자고 하길래 토할만큼 걸었다. 후아. 몸도 생각하고, 이정도면 제법 균형잡힌 날 아닌가, 자축했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집에 돌아와 시계를 보니 겨우 한시간 십분 지나있어 민망했다. 진짜 토하는줄 알았는데.

그래가지고. 아무래도 몸은 번거롭고 거추장스럽다. 번거로운 몸에 매일 옷을 바꿔 걸쳐입(어야 하)는 것은 더블로 번거롭다. 그런 옷을 그 수많은 매장들의 옵션중에 새로 고르는 것은 세배로 번거롭다. 미뤄왔던 일을 맘먹고 치루듯이 같은 티셔츠를 또 색만 다르게 골라 여러장 샀다. 

지난 몇 주간 들었다놨다 했던 책들 중 세 권의 마지막 장을 공교롭게도 오늘 한꺼번에 덮게됐다. 하루동안 왠지 사흘을 살아낸 것 같은 묘한 느낌이다. 특히 오늘 이른 아침의 그린티 소이빈 머시기 프라푸치노는 나흘 전쯤 일인 것 같다. 많이 웃었는데. 

7.06.2012

They Say We're Moving

Open Window at Colliure
Henri Matisse


회사가 이사를 간댄다. 짐을 싸라고 해서 있는대로 박스안에 던져넣은 것들이라고 해봤자, 프린아웃 몇 장, 옆옆 사람이 준 탁상용 달력, 전에 옆자리 앉았던 사람이 물려주고 간 알록달록 모닝글로리표 연필깎이, 연필 몇 개, 미처 얼굴 본 적 없는, 전에 내 자리에 앉았던 사람이 연필통 대신 쓰던, 별 불만 없어 그뒤로도 그냥 그렇게 쓰여지도록 놔두던 머그컵. 허심탄회하게 저 물건의 주인은 나요, 할 수 있는 것은, 그 종을 모르겠는, 그렇지만 어쨌든 가짜라 별로 상관없는, 조그마한 가짜 식물이다. 주인과 어울리지 않으오, 하기에는 결정적으로 가짜다. 아니 결정적으로 가짜라서 주인과 어울리게 되는건가. 

하여간 지네들끼리 구겨지지도, 겹쳐지지도 않는 소박함이다. 이렇게 다 집어 넣고도 상자가 반도 안찬다. 옆자리 앉은 분들을 보니 상자가 한 개씩이 아니다. 괜히 옆머리를 긁적인다. 뭘 더 집어넣을 것이 없나 두리번대다가 생각난 중요한 것 (치약, 칫솔)을 마저 챙겨 집어넣고, 목적에 충실하고 싶었지만 가볍고 헐렁하여 머쓱해져버린 상자 그대로 밀봉해 이름을 부착해버렸다.

상자를 다시 한번 들어보고 내려놓는다. 짐 싸는데 전부 걸린시간은 5분 안팎. 상자의 무게가 암시하는 것은 그것과 정확히 반비례하는 만큼 진지하고 의미심장할 수 있어 자연스럽게 여러 의문과 의심을 쏟아내지만. 아직 출구가 보이지 않는다. 

퇴근하려는데 옆에 언니가 아직도 일에 무척 바쁜 모양이다. 비교적 한가하게 앉아있다가 일어나는 참이었던 나는, 하필, 출근 시간은 헐렁해도 퇴근시간만큼은 종교적으로 지키는 여자라, 그제서야 옆 사람이 바쁘던 것을 알아차려도, 언니 바쁘시면 도와드리고 갈게요,에 진심이 들어있는지 없는지 알길없이 흐릿하게 말을 굴려버린다. 말하기 전부터 이미 로그오프였다. 귀가 길에 내내 마음이 불편하다. 언니는 오늘 몸도 별로 안좋았다. 마음 편할 날이 드문 것은 여하튼 다 내가 어지간히도 저밖에 몰라서이다. 자유는 양심과 조화로울 때만 가능하다.

사람 좋은 척하는 것에, 혹은 좋은 사람인척하는 것에 유독 비위가 약한 사람들이 있다. 나도 그들 중 하나지만 그래도. 흉내라도 내는 것이 필요한 것들이 있다.


Rachmaninoff Symphony No.2, Op.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