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6.2012

They Say We're Moving

Open Window at Colliure
Henri Matisse


회사가 이사를 간댄다. 짐을 싸라고 해서 있는대로 박스안에 던져넣은 것들이라고 해봤자, 프린아웃 몇 장, 옆옆 사람이 준 탁상용 달력, 전에 옆자리 앉았던 사람이 물려주고 간 알록달록 모닝글로리표 연필깎이, 연필 몇 개, 미처 얼굴 본 적 없는, 전에 내 자리에 앉았던 사람이 연필통 대신 쓰던, 별 불만 없어 그뒤로도 그냥 그렇게 쓰여지도록 놔두던 머그컵. 허심탄회하게 저 물건의 주인은 나요, 할 수 있는 것은, 그 종을 모르겠는, 그렇지만 어쨌든 가짜라 별로 상관없는, 조그마한 가짜 식물이다. 주인과 어울리지 않으오, 하기에는 결정적으로 가짜다. 아니 결정적으로 가짜라서 주인과 어울리게 되는건가. 

하여간 지네들끼리 구겨지지도, 겹쳐지지도 않는 소박함이다. 이렇게 다 집어 넣고도 상자가 반도 안찬다. 옆자리 앉은 분들을 보니 상자가 한 개씩이 아니다. 괜히 옆머리를 긁적인다. 뭘 더 집어넣을 것이 없나 두리번대다가 생각난 중요한 것 (치약, 칫솔)을 마저 챙겨 집어넣고, 목적에 충실하고 싶었지만 가볍고 헐렁하여 머쓱해져버린 상자 그대로 밀봉해 이름을 부착해버렸다.

상자를 다시 한번 들어보고 내려놓는다. 짐 싸는데 전부 걸린시간은 5분 안팎. 상자의 무게가 암시하는 것은 그것과 정확히 반비례하는 만큼 진지하고 의미심장할 수 있어 자연스럽게 여러 의문과 의심을 쏟아내지만. 아직 출구가 보이지 않는다. 

퇴근하려는데 옆에 언니가 아직도 일에 무척 바쁜 모양이다. 비교적 한가하게 앉아있다가 일어나는 참이었던 나는, 하필, 출근 시간은 헐렁해도 퇴근시간만큼은 종교적으로 지키는 여자라, 그제서야 옆 사람이 바쁘던 것을 알아차려도, 언니 바쁘시면 도와드리고 갈게요,에 진심이 들어있는지 없는지 알길없이 흐릿하게 말을 굴려버린다. 말하기 전부터 이미 로그오프였다. 귀가 길에 내내 마음이 불편하다. 언니는 오늘 몸도 별로 안좋았다. 마음 편할 날이 드문 것은 여하튼 다 내가 어지간히도 저밖에 몰라서이다. 자유는 양심과 조화로울 때만 가능하다.

사람 좋은 척하는 것에, 혹은 좋은 사람인척하는 것에 유독 비위가 약한 사람들이 있다. 나도 그들 중 하나지만 그래도. 흉내라도 내는 것이 필요한 것들이 있다.


Rachmaninoff Symphony No.2, Op.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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