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7.2013

becky shaw


나는 감기몸살에 옴팡 걸려 어제 오후 두시 반정도부터 드러누웠다. 오후 7시 반쯤 일어나 White Box에 갔다가 11시 쯤 돌아와 다시 바로 침대에 누웠다. 오늘 오후 두시 즈음까지 계속 누워 자다 깨면 빅 뱅 띠어리와 더 굿 와이프를 번갈아 보았다. 이렇게 가책없이 오랜동안 누워서 아무것도 안하고 원하는 만큼 미드를 볼 수 있는 기회는 최소 10개월만에 처음이다. 깨는 중간중간 계속 약을 밀어넣었더니 지금은 많이 괜찮아졌다.

Becky Shaw의 마지막 공연이 있었다. 난 6번째 보는 거라 대사들도 왠만큼 다 외우고 굳이 열심히 듣고 있지 않아도 손가락이 알아서 리드미컬하게 자막을 넘긴다. 자꾸 반복해서 보는 공연이 아예 지루하지 않다고 한다면 거짓말이고 그나마 배우들이 매번 한 두 명씩 바뀌고 중간중간 까먹는 대사들에도 변화가 있고 무엇보다 매번 관객의 호응이 드라마틱하게 다르니 어떤 날 공연이 어떤 다른 날 공연과 같다고 말하는 건 심한 무리다. 오늘은 어느 대학교 영문학도들처럼 생긴 학생들이 단체로 관람을 하러와 반 정도 자리를 채웠다. 이 연극에 대해 페이퍼를 쓰면 크레딧을 주겠다고 했는지 학생들이 중간중간 노트하는데 열심이었다. 난 사실 몇몇 바뀌는 배우 중 앤드류 역할에 선호하는 배우가 있어 대미는 그가 장식했으면 했는데 그렇게 안되어 조금 섭섭했다. PTC가 다음 달 작품을 마지막으로 한국을 떠나기로 한 결정에 대해서 나는 아직도 먹먹하다. 오늘 공연이 끝나고도 난 여느 때와 같이 뒤도 안돌아보고 횅 나왔지만 마음만은 그러하지 않다. 순전히 아직은 내 마음을 알아주지 않아도 괜찮음에서이다.

컨디션이 꽤 괜찮아 집으로 바로 들어가지 않고 옆 동네 "무대륙"에서 한다는 여기에 갔다왔다. 간단히 메모해 놓은 약도를 참고해서 슬렁 슬렁 걷다보니 어느새 찾는 곳이 마당에 펼쳐져 있었다. 두리번 두리번한 발걸음이 었으나 둘러보다 보니 어느새 컬쳐 앤 라이프매거진 한 권, 그래픽 디자인 잡지 한권, 이 앞의 두 잡지군에 종속되기에는 말이 다소 많고 깊이도 좀 그렇지 않겠는가 추정되는 domino 4호, 옆서 한 세트, 스티커 한 세트, 색칠 공부 그림 한 세트, 스텐실 그림 한 장을 한 쪽 팔에 전부 다 거머쥐고 있었다. 수 십개의 부스가 있었던 것 같은데 대부분의 컨텐츠는 "이국적"으로 보이는 사진과 함께 지극히 개인적인 생활에 대해서 끄적이거나 지극히 개인적인 생활을 시의 형식으로 풀었다거나, 일반적인 미적 기준에 상관없이 소신 있게 그렸으니 "진정성"으로 어필하겠다는 일러스트레이션 관련 옆서, 노트, 수첩, 서적, 에코백이 정신없이 많았다. 난 그들이 표현하거나, 표현하고자 했으나 잘 안됐거나, 아니면 어쩌다 어떨결에 표현된 각자의 모든 개성을 존중하고 싶다. 그것만이 다는 아니지만. 적지 않은 계산을 치루고 슬렁슬렁 걸어 합정 상수 어디쯤의 딱 보기만 해도 잘할 것 처럼 보이는 식당에 들어갔다. 갈비탕을 폭발적으로 맛있게 먹고 집에 돌아와 씻고 다시 침대에 쏙 들어와 있다.



방은 아찔할정도로 엉망진창이고 다음 주 수업 준비는 하나도 안돼있고 번역 거리는 그제 멈춘 데서 그대로다. 그래도. 난 아팠으니까라는 구실이다. 하나 안한게 더 있는데 그건 안써야지.

10.14.2013

mundane monday


오늘도 여기에. 출석을 찍었지만. 내리찧는 공사판 소리에 여섯시간 반밖에 못잔게 화딱지가 나. 여기 앉아 신수동 주민센터에 전화를 걸어 민원을 넣었다. 시끄러워 아침에 집에 있을 수가 없습니다. 또 하나가 올라가는 데 그렇다면 3개월을 또 견뎌야 한단 말입니까.

정확히 일주일을 미뤄왔던 이메일을 보내고 거의 삼 주만의 번역이자 PTC의 서울 마지막 쇼가 될 Race 작업을 시작했다는데 이번 주 월요일 오전의 의미가 있겠다.

제본할 악보가 몇 개 있고, 빨리 써서 아이디어 주머니와 함께 부쳐야 하는 손글씨 편지가 있고, 출력해야 할 기사가 하나 있고, 안좋아지기 전에 어떻게든 보기좋고 맛좋게 써먹어야 하는 재료들이 냉장고에 있고, 정해진 시간동안 한군데 앉아있어야 하는 책임이 있다. 지금 간다.

10.12.2013

ennui


이건 뭐지. 바깥 어디엔가 시선을 던져두고 적절한 느낌을 찾는다. 딱히 마땅한 단어가 없다. '안중요'나 '불필요'도 아니고 '뻔함'이나 '무가치', '무기대'도 아니다. '권태'가 그나마 나을 듯 싶다.

집 바로 뒤 건물이 거의 두 달에 걸쳐 올려지자 마자 집 대각선 뒤 건물 역시 하루만에 부서지고 다시 쌓고 있는 통에 시끄러워 아침 잠을 계속 못자고 있다. 그것을 구실 삼아서나 다른 이유에서나 며칠 째 연속으로 이 까페에 와 아침을 해결하고 이런저런 잡다한 일들을 하고 있지만.

그러게. 나는 어느 순간 시시해져 그만둬버린 리빙 라이프도 AA 모임에 나가는 정신으로 아침마다 요즘 꼬박꼬박 읽고 있는데. 매사에 얕잡아보는 어리석은 짓을 경계하고, 효과나 의미가 없을 것 같은 것들을 되도록 빈정신으로 어쨌든 성실하게 해보려는 중인데.예매해 놓은 영화를 보러가기도 귀찮고.


8.08.2013

I cook


왠만하면 해먹는다. 싱싱하고 신선하고 좋은 재료에 대해 점점 의식이 생기면서 온 불편함이다. 왠만한 식당 주방에서 무슨 일이 어떻게 일어나고 있는지 모르겠는데에, 냉소에서 유발된 의심이 한층 더 쌓이면서 점점 변형되온 생활 패턴이다. 이제 내가 하는 요리에 왠만큼 입맛도 고정되어, 값비싸고 제대로 하는 식당이나 한 메뉴만을 몇 세대 파온 전문점 말고는 내가 한 음식이 낫다는 생각이다. 이 동네에도 여러 식품점이 있지만 재료의 종류나 싱싱함에 있어 옆동네 이마트만은 못해 일주일에 한번씩은 장을 봐 냉장고를 채워넣는다. 일부러 나가는 건 아니고 적어도 일주일에 두 번 이상은 이 동네를 벗어나야 하는 스케쥴이 생겨서 돌아올 때 들러 사오게 되니 별 짐도 아니다. 요리에 임하는 불필요한 각오나 법석도 많이 줄어 이제 날치알 크림 파스타 정도는 15분이면 한 차림 만들어낸다. 특히 밖에서 먹는 한식 밥은 거의 재미없는 흰밥이나 묵힌 밥일 경우가 많아 아깝다는 생각이다. 한달에 한번 정도 찾아주시는 엄마는 볼 때마다 말라가는 것 같다고 괜히 걱정이지만 난 보기보다 많이, 잘도 먹는다.

Seoul Players에서 9월에 있을 10 Minute Plays를 위해 한 2, 3 주 전부터 번역 작업을 해오고 있었는데 예상 외로, 당최 이딴 걸 작업해서 뭐하나, 하는 회의가 밀려오게 하는 작품들이 꽤 여럿 있어 작업 중 한숨을 많이 쉬고 있다. 특히 가장 최근 번역한 두 작품이 더욱 그랬어서 작업 속도가 꽤 더뎌졌던 중 오늘 아침 그걸 끝냈다. 특히 뭔가 포스트모던해야 한다는 걸 의식하며 쓴 것이나 스마트하게 보이고 싶다는 작가의 숨겨진 의식이 감지되는 것들은 정말 하기 싫다. 엊그제 C가 부탁한 경제 관련 기사같은 걸 번역하느라 어제 몇시간을 썼는데, '라인들 사이에 뭔가 숨겨진 의미가 있진 않을까' 아니면 '이런 단어가 슬랭으로 뭐 다른 의미가 있나' 걱정하며 어번 딕셔너리를 뒤져보지 않아도 되어서 편하고 그런 두 번 생각해볼 것 없는 명쾌한 문장들과 단어 사용은 오랜만이라 새로웠다.

엊그제 퇴근 후에 아트레온에서 The Place Beyond the Pines를 K와 같이 가서 봤다. 난 Ryan Gosling과 Bradley Cooper에 대해 별 감정 없기 때문에 - 아, 'Silver Linings'에서의 Bradley Cooper는 분명 빛났다고 생각했지만 - 적어도 이 영화에 있어서 만큼 그들의 연기는 출중했다고 평했는데 K는 워낙 이 배우들을 별로라 한다. 영화 초반이 필요 이상 길었다는데에 동의하지만 충분히 예상 가능하면서도 너무 진부하지 않은 플롯이나, 어울리지 않는 듯 어울리는 Arvo Pärt의 사운드 트랙 등, 늦은 시간에도 불구, 볼만한 가치가 있었던 영화였다.

내 공간이 나한텐 완벽에 가까운 게 맞지만 블루투스가 되는 스피커를 하나 새로 놓으면 더 좋겠다 싶다. 신촌 프리스비에서 봐둔게 있긴 했는데, 일하러 가는 길에 하이마트를 들러보자.

8.06.2013

But then


어떤 의미에서 게을러 진 것도 맞지만 더 맞게는 말을 다루는 방법을 많이 잊어버렸기 때문이다. 문장을 써내기가 어렵고 이따금씩 굵직한 단어들이 생각났다가 곧이어 사라진다. 일단 써야지만 생각이 이어지는 불편함이 있는 사람이라 생각들이 줄창 점만 찍고 있지 선이 되는 경우가 드물다. 이런게 쌓이다 보면 어느 순간 걷잡을 수 없는 답답함이 치밀어 오른다.

창가 옆에 그럴 듯한 작업 공간을 새로 마련했다. 안그래도 내 공간은 위험할 정도로 많이 좋아해 스스로 문제 삼을까 하는데, 이건. 아찔하다. 도통 밖에 나갈 생각을 안한다. 특히 이런 흐린 날에 이렇게 창가에 딱 붙어, 세상에서 가장 편한 자세로 앉아, 좋아하는 음악과 바깥의 흰색 소음을 배경삼아 키보드를 두드리는 작업을 하는 것이 나는 너무 좋다. 하늘은 한 두어 시간 전부터 부릉부릉 시동만 걸고 막상 비를 뿌리고 있진 않지만 이른 밤처럼 어둡고 여름은 습하고 에어콘 실외기 작업을 하는 인부들은 바깥에서 바쁘다. 어젠 어린 시절 생각이 나 일부러 진짜 향을 피우는 모기향을 사가지고 와 창가에 놓았다. 아직 샤워를 안했지만 나는 아침부터 살아있다고 느낀다. 이 모든걸 가능하게 하는, 매일 아침 전쟁을 치루지 않아도 되는 일을 가져서 나는 새삼 다시 감사하다.

사진은 지난 토요일 이태원의 우드스탁에서 찍은 것이다. 기대가 전혀 없어서였는지 몰라도 House of Cards 사운드트랙에 딱 어울릴만한 그런 칠 아웃이나 라운지, 일렉트로니카류에 가까운 록이어서 즐겁게 취했다. 그러다 라이브 음악과 House of Cards의 연상작용으로 생각나게 된 M에게 그자리에서 반가운 이메일을 보내고 반가운 답장을 받았다. 한국에서의 마지막 날, 작별 선물을 준비해주지 않아 내심 꺼려하며 깨끗하지 않은 녹사평 주변을 같이 걷다가 즉흥연주처럼 What the Book에 쑥 들어가 Infinite Jest 첫장에 젊음 (청춘이란 말이 어쩐지 이젠 쑥스럽다) 을 담아 선물해줬던 것은 정말 재밌고 뿌듯한 일이었다. 그 한 짐 되는 책을 들고 여러 국경을 넘어다니며 폴란드와 독일 사이 어디쯤 버스에서 마지막 장을 덮는 동안 무수한 일이 일어났다. 그것은 곧 책으로 쓰여질 모양이지만 나는 궁금하다. 여기 이 창가에 그대로 바짝 붙어 앉아 나는 궁금하다.

엊그제 일요일에는 <A Late Quartet>을 봤다. 미리 Y로부터 귀뜀을 받아 마지막 씬에 대해서는 각오 비스무리한 걸 하고 있었지만 그렇지 않아도 나는 여러 랜덤해 보이는 장면에서 울었다. 괜히 운 건 아니고 이유가 있을 텐데 그 얘기를 좀 쓰고 싶지만 나는 이제 일어나 샤워해야 할 책임이 있다. 그건 여러면에서 다행스럽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