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치 연극을 보고 있는 것처럼 매사에 거리를 두고 경험하는 것.
나는 어제 The Paris Review에 걸려있던 링크에 순종해서 Saul Bellow와 그의 작품에 관한 기사를 하나 읽었다. 철썩같이 믿었던 (말년까지 다섯번 결혼한 이에게 이런 표현이 어울린다면) 그의 아내와 생계까지 알아봐주었던 그의 절친은 바람이 세게 났다. 그리고 남의 얘기를 하듯 그렇게 Herzog을 썼다. 3, 4년 전쯤 읽었나. 좀 더울 때였던 것 같기도 하고. 처음 몇 페이지 읽을 떄부터 Moses와 나는 대단히 깊이 연관되어 있는 것처럼 느껴졌었다. 최근에 봤던 John Updike의 단편소설에서도 좀 비슷한 성질의 흥미로움을 발견했는데, 그렇다고 해서 바로 나는 유태인들과 뭔가 동질감을 느낀다고 하는 것은 성급하다. 유태인 문학 (이렇게 따로 분류될 수 있기나 하다면) 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된다는, 더 정확히 말해서 편리하게 공통적으로 발견하고 싶어하는 형이상학 관점에서의 디아스포라적 셋팅, 개인의 소외와 고독과 결핍, 이런 주제들에 자연스럽게 빠져든다 하더라도 나는 Philip Roth의 작품들을 좋아하는지는 영 자신이 없다. 씹고 또 씹고 계속 씹히는 실패감.
그는 편지를 쓰기로 결심한다. 여기저기 아는 사람이나 모르는 사람이나 이름을 들어본 사람에게. 왜냐면 설명하고 꺼내고 정당화시키고 시점을 갖다 붙이고 명확하게 하고 수정해보려는 필요를 느꼈기 떄문이라는데 (the need to explain, to have it out, to justify, to put in perspective, to clarify, to make amends). 나도 같은 이유에서였는지는 모르겠지만 한참 여기저기에 편지를 쓰던 때가 있었다. 중학교떄인가 사촌언니가 잠깐 우리집에 있을 떄는 그녀의 친구 남자들에게도 마치 Ulysses의 Penelope 챕터처럼 막 쉼표 마침표 하나 없이 몇 장씩 이어지는 편지를 덥석 내어놓고 답장을 요구해 여럿 당혹스럽게 했던 기억이 있다. 더 어렸을 떈 누군가와 그렇게 주기적으로 편지가 오가다가 어느날 뷁, 홱 등을 돌려 여럿 울리기도 했다. 뭐니뭐니해도 진짜 편지같았던 편지는, 그, 나와는 영 어울리지 않았던 캘리포니아의 햇빛을 온몸으로 불편해하는 중에 군대에 있던 친구와 주고받았던 조각, 대화들이다. 그 이후로는 긴장하는 기색과 어쩔 수 없이 준다는 기색이 역력한 엽서 몇 장을 더 받았을 뿐이고 나도 별로 쓰지 않았다.
저녁때 또 고기를 맛있게 먹은 것 같은데, 음. 햇빛이 쨍쨍할때 내장을 다 꺼내놓고 디톡스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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