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nri Fantin Latour |
Bertrand Russell의 Why I Am Not A Christian을 듣다가. 똑바로 두 발을 땅위에 딛고 서서 용감하고 대담하게 있는 그대로 솔직히 볼 줄 알면 그래서 뭐. 할 수 있는 한 '좋은' 세상을 만들어서 뭐. '더 나은' 인간이 되서 뭐.
물론 두려움을 느끼거나 인정하는 것은 과히 즐거운 일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런 걸 떠나기 일쑤인 내 그것과 의문의 방향 자체가 다른 것 같다. 나는 어쩌다가 내가 두려움을 느낄 수 있는건지, 왜 소위 선하다고 하는 것들이 양심을 찌르는 것들보다 더 좋은지, 단지 교육에 의한 훈련과 습관이라고 인정해버리기엔 본인이 너무 반항적이고 의심많은 인간인 것을 포함해 모두 다 경이로운 것이다.
인간의 조건을 인식하기 위해서는 그 외 것들을 인지할 수 있는 초현실적인 (적당한 단어가 생각나지 않으므로 대충 이거라 하자) 감각이 필요한 데, 그것은 인간, 개인 내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어떤 작용, 움직임, 흐름 등을 자신있게 믿어버리는 동시에 접근 경로가 꽉 막혀버릴 수 밖에 없는 것이 재밌다. 그것이 닫힌다 하더라도 삶을 사는 방식은 참으로 다양해서 시험삼아 이리저리 왔다갔다 하기만해도 얼마든지 눈치채지 못하고 금방 끝나버릴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가진 자원과 기관들을 최대한 활용하는데서 나오는 멋과 미가 있긴 하지만 결국 나는 다른 게 아니라 그런 조건, 굴레, 예상가능함, cliché에서 자유롭고 싶은 것이다. 상황과 조건에 굴복하지 않는 자유와 평화를 흠모한다. 누구나 다 좋다고 하는 것이긴 하지만 그러는데에 이유가 있는 것이 대부분이고 같은 단어를 사용하면서 다른 것을 가리키는 경우가 또 대부분이라는 것을 꼭 두들기고 마는 나는 좀 고리타분하게 의미에 집착하는 편이고 대신 일관성이 없다는 것이 애교랄까. 하하하.
다행히도 그런 것들은 지식을 얻는 것처럼 단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다르게 해석될 수 있는 여지를 두는지, (얼만큼 본인이 생각하는 것과 달라도 되는지, 여지의 크기는 얼마나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스스로를 얼마나 믿지 않는지에 따라 그것에의 접근 가능성이 열리고 닫히는 것 같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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