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6.2011

The Unbearable Fickleness



오늘 잠실에서 있었던 약속이 내일로 미뤄지면서 내일 저녁에 만나기로 했던 녀석을 오늘 저녁때 만나기로 했다. 녀석이 되도록 빨리 퇴근을 한다고 했지만 그래봤자 내 퇴근 시간보다 한참 늦고 또 녀석말을 믿지도 않기 때문에 나답지 않게 퇴근시간이 지나도록 늑장을 부리며 천천히 짐을 싸고 나가려는데 우산이 없었다. 아침에 스타벅스에서 놓고 나온 것이 분명했다. 산지 얼마 안되는 좋아하는 우산인데. 안타까웠다. 그냥 안타까운 것이 아니라 많이 안타까웠나보다. 혹시나 마음 착한 누군가가 맡겨놓지 않았을까해서 아침에 들렀던 스타벅스로 가는 짧은 거리동안 말풍선이 부릉부릉 생기며 다그치는 것이 보인다. 그러게 멀쩡한 회사 팬트리를 두고 니가 아침부터 부르주아 행세를 한다했다. 칠칠맞지 못하게 맨날 주르르 흘리고나 다니고.. 맡겨진 우산이 없다는 파트타이머에 말에 '그러면 그렇지'라는 말풍선을 홱 그리고 팽 돌아서려는데 다른 파트타이머가 끼어들더니보통 매장에서 물건을 두고 나왔을 경우 그 물건을 찾을 확률과 찾지 못할 확률에 대해서 매우 열정적으로 설명을 해준다. 내가 아침에 앉았던 자리까지 손수 가서 다른 손님이 앉아 계신데도 눈으로 샅샅이 뒤져준다. 계단을 내려오는 동안에도 오히려 고가의 물건일 수록 더 찾을 확률이 높았노라고, 우산 정도면 그냥 가져가는 경우가 많지만 혹시 모르니 연락처를 남기라고. 해서 남기고 녀석과 만나기로 한 약속 장소로 가는 동안에 전화가 온다. 회사에서 갑자기 하라는 일이 생겨서 오늘 안되겠다고. 원래 이름은 떼어버리고 내가 아예 회사 이름을 갖다 붙여준 이 녀석이 이러는 것은 전혀 놀랄일도 아니지만 순간 기분이 팩 상했다. 다시 발길을 돌려 집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러 가는데 계속 기분이 상했다. 나는 삼계탕을 먹고 싶었는데 쌀국수를 먹자고 했었던 것도 거슬리고 디저트로 상큼하게 빙수를 먹으려고 했던 것에 이의가 제기된 것도 거슬렸었다. 내가 삼계탕을 먹으러 가자고 할 때마다 바로 어제 먹었다고 하는 것도 괘씸했다. 그러다가.. 이 속좁은 여자야. 마음 줄 것이 없어 겨우 우산 따위에 마음 주고응. 그런 변덕스런 약속에 연연하고응. .. 하는 다시 다그치는 모드가 합세하니 이중으로 기분이 더 상했다. 비는 정말 징그럽게 계속 오는구나. 그러고보니 오늘 아침부터 일진이 좋지 않았다. 출근길 올라탄 버스에 유일하게 남아있던 한자리. 턱이 높게 올라온 자리라 꽤 짧은 원피스를 입은 내가 앉을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기 때문에 복도쪽에 앉아 계신 아저씨에게 불편하시겠지만 창가쪽으로 앉아주시면 안되겠냐고. 이 아저씨. 곤란한 내색도 없이 단말마로 싫으시단다. 다시 열심히 핸드폰으로 매일경제를 들여다보고 계신다. 그래서 내가 삼십분을 그렇게 서서 왔잖아. 그것도 성이 난다. 점심에 먹은 죽도 정말 어쩜 그리 맛이 없었는지. 맞아. 오후에 쫌 민망한 일도 있었어. 왜 이렇게 버스가 안오나 하는 와중에 아이폰에서 나오는 음악들은 왜 이렇게 또 거지 같아. 버스는 왜 이렇게 추워. 뒷좌석에 앉은 사람들은 끊임없이 떠들어대. 어디가 어디라고 알려주는 버스 방송 소리는 또 왜이렇게 귀청이 떨어질 것처럼 시끄러워. 펼쳐든 글자도 눈에 안들어와. 읽는데 눈에 안들어오니 또 이중으로 기분이 상해. 몇십개의 투덜투덜대는 말풍선을 만들며 터벅터벅 집으로 걸어들어오는데 밀려오는 편두통이 저쪽에서 보인다.


그리고 집에 들어와서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의자위에 고스란히 놓여있는 우산.


마치 누군가 무척이나 성가시다는 표정으로, '아- 어지간히 해라 어지간히- 옛다, 니 우산' 하며 휙 던져준 것 같은.

그제서야 오늘 아침에는 비가 오지 않았었다는 것. 마침 우산 챙기는 것을 깜빡하고 나갔었다는 것. 스타벅스에서 앞쪽 좌석에 우산을 내려놓았던 것은 지난주 언젠가의 장면이었다는 것이 생각났다.

그러면서 다 용서가 되었다. 날씨도, 그 녀석도, 아침에 그 매일경제 아저씨도, 맛없던 죽도, 민망하게 했던 이도, 거지같은 음악도, 버스 안의 큰소리도..

쫌 용서하기 힘든 한가지는
홀랑홀랑 좌지우지되는 이 바보. 해삼. 멍충이. 완전 진상. 서른 넘어 우산에 집착하는 녀자. 오늘은 전혀 귀엽지도 않아.

여하튼 긴장부터 해소까지 감정 소비가 많았던 지라 매우 피곤하다. 편두통은 점점 가까워져오고. 내일 툭하면 출근 안할테지만 왠만하면 할테다. 왠만할 경우엔 오늘 우산의 되찾음(?)과 또 새로운 하루를 축하하는 기념으로 오늘 아침에 갔던 데에서 엑스트라 카라멜 시럽과 생크림이 오방 올려진 달달하고 시원한 음료를 시킬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삼계탕. 에, 그것은 이미 내일 점심에 먹기로 회사 언니와 약속했다. 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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