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2012

Pina

Sunset on the Coast
Ferdinand Loyen Du Puigaudeau

아침에 사과를 깎기 전, 손을 씻으러 화장실에 갔는데 누군가 코피를 흘리고 있었다. 괜찮냐고 여쭤보니 괜찮으시댔다. 그런데 정말로 코피를 흘리면서도 괜찮을 수 있는 것 같았다.

어제 나는 36색 유화물감이 생겼다. 지금 쓰고 있는 12색 물감중에서 가장 많이 쓴 흰색이 무려 두 배 사이즈로 두개나 더 들어있는, 황송한 물감이다. 원래 쓰던 물감으로도 보통 그리는 캔버스로 치자면 50장도 더 넘게 생산해 낼 수 있을 듯 한데 말이다. 사실 물감도, 캔버스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문제는 절대적인 시간이다. 더군다나 나는 지난번 무심히 한 시간 정도 들여 졸작을 하나 덩그러니 그려놓고 그 형편없음의 정도에 정신이 바짝 깰 만큼 충격을 먹어, 그 후 붓을 드는 것에 주춤하고 있는 상태이다.

너의 지성과 위트,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고 두루 넓게 경험하는 실험 정신은 참 멋지구나!

나는 이제 방자한 짓은 약간 정도 삼가고 십여 년 전 뭣도 모르고 싫증냈던 일본어를 다시 들여다 봄 직도 하고 뭣도 모르고 알고 싶어했던 이태리어에 대한 거품이 다 빠지기 전에 얼른, 한달만 하면 단테만큼 한다, 같은, 글자보다 컬러풀한 그림이 더 많이 들어가 있는 책이라도 하나 공수해봐야 겠다고 생각만 한다.

보통 저녁을 푸짐하게 먹는 편인 나는 요즘따라 점심 때 무엇을 먹고 싶은지 헷갈리거나 꼭 먹어야 하는 상태인 건지 모르겠는 경우가 많아 그냥 하릴없이 광화문을 헤매는 때가 종종 있다. 특히 이번 주에는 계속 교보문고에 가서 다자이 오사무의 단편집을 조금씩 읽는 중이다. 엊그제 낄낄대며 보던, '나의 소소한 일상'은 원래 잘 나가는 책이었는지 바로 그 다음날 사라져버렸고 어제는 그의 단편 중 '유다의 고백'을 읽었다. 오늘은 '고향'과 '달려라 메로스'를 읽었다. 단편에 조금 물려서 '만년'이라는 소설을 조금 읽다가 시간이 되어 사무실에 돌아왔다. 운동 역부족인 나는 조금만 그렇게 서서 책을 읽어도 금새 힘이 들어가 얼굴이 불그스름 해지는데 그 모습은 어색하고 촌스럽기 그지없을 것이 분명하다. 

귤 네개를 연속으로 까서 한번에 털어넣었다.

보시다시피 나는 요즘 Ferdinand Loyen Du Puigaudeau라는 이름도 긴 화가의 그림에 빠져있다.

퇴근 후 집에 바로 와서 오랜만에 해산물을 넣고 음식다운 파스타를 만들어 먹으며 와인을 좀 했다. 식사를 하면서 옆동네 어여쁜 마드모아젤로부터 공수한, 아껴두었던 다큐멘터리 Pina를 보았더니, 씹어넘긴 스파게티 가락이 씹어지지 않은 원래의 상태로 입에서 되뱉어져나오는 것 같은 기이하고도 충격적인 경험을 한 듯 하다. 일어나 움직이기 싫을 때 종종 꺼내봐야 겠다. (사실 나는 어제 광화문에서 서대문까지 약간 걸음 걸었음에도 요란하게 얼굴을 찌푸리며 엄살을 떨었던 모양이다.) 배에 구멍이 난 것처럼 춤을 추는 건 어떤 것일까.. 생각해보려다 배에 구멍이 난 적이 없어 그만 두었다. 그렇지만 연상시키는 노동을 하지 않으면 아무런 연상도 할 수 없게 되는 것이 맞다.

영화에서 좋았던 음악들 몇 개 모아둔다.  

Jun Miyake, Here And After



Jun Miyake, Lilies of the valley



René Aubry, Memoires de Futur



Thom Hanreich, Glasshou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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