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그냥 빛이 쏟아지는구나, 침대에 앉아 멍하니 밖을 내다보고 있으려니 허영이 꿈틀꿈틀 또 어딜 자꾸가자며 불안하게 두리번거린다. 이럴 때 마취적이긴 하지만 비교적 비폭력적인 게으름은 잘 구슬리면 꽤 똑똑해지는데, 이를테면 두리번 거리는 허영의 목을 홱 돌려 반항심으로 바꿔놓는다. 그래가지고 본인은 뷁, 눈앞에 풋크림이라고 써있는 것을 발이 아닌 손에 잔뜩 바르고 엄청 통쾌한 반란이라도 일으킨 양, 우헤헤.
날씨가 좋고 마음이 좋으면 이중으로 좋은 것이고
날씨가 좋은데 마음이 좋지 않으면 이중으로 좋지 않은 것이다.
날씨가 좋지 않은데 마음이 좋으면 그냥 좋은 것이고
날씨가 좋지 않은데 마음도 좋지 않으면 그냥 좋지 않은 것이다.
본인은 그렇다는 얘긴데 Milton의 Satan도 비슷한 얘기를 했더랬다:
The mind is its own place, and in itself
Can make a heaven of hell, a hell of heaven.
마음 얘기도 나오고, 꽃도 막 있고, 날씨도 좋았고 하니... 사랑을 하는 사람은 참 훌륭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마음을 넙죽 내어 줄 수 있는 것이 어쩐지 부럽고 경이롭기까지하다. "...he who loves... is more divine than the beloved, because the god is in the former, but not in the latter," thinks Aschenbach in Death in Venice. Which, I think, reflects 1 John 4:8 "Whoever does not love does not know God, because God is love." 그렇지만 이 사랑은 사랑스럽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사랑할 수 있는 능력까지 포함한 것이므로 본인이 말하고 있는 좁은 의미에서는 논외가 될 수도 있는 문제...일까. 다른 사람들은 잘 원하지를 않는 어떤 것이 본인에게만 사랑스러워보이는 것이 있긴 있을 텐데. 다른 사람이 원해서 본인도 어쩌다보니 원하게 되는 순서가 판을 치는 곳에 살고 있다보니 그런 것은 참 희귀해 보인다.
이런 좁은 범위 중간 범위 큰 범위에서 사랑이라고 통용되는 것을 관찰해보면 재밌겠다 해서 본인은 미학과, 별로 관심없는 정치적인 시각, 심지어 전혀 동의하지 않지만 왠지 그들에게 그럴듯하게 들릴 것 같은 심리학에서의 진화설을 덧입혀 학자들에게 '연구'라는 것을 해보겠다 했으나 그들은 그 때 아마도 '사랑'이라는 주제가 너무 제너럴하고 나이브하다고 판단해서, 헹, 코웃음들 치셨으리라. 실제로 신학이 아닌 문학에서 그 주제를 '연구'해 본 사례는 충격적으로 드묾에도 불구하고. 학사 석사 논문 모두 조이스를 쓴 본인이 갑자기 연애 소설만 읽겠다고 했던 것도 아닌데. 인간의 의식이라는 것이 얼마나 미묘하게 복잡하고 다갈래인가, 그걸 또 왠만큼 멀찍이 보면 얼마나 또 그런대로 말이 되는 것 같은가. 글쓰기의 정교한 구조와 스타일, 끝없이 자기를 들여다보는 중독적인 집착(!)에 대해 오, 놀라워라, 하는 것이 좀 지루해지고 의미가 없어졌다 뿐인데. 지금까지 조이스를 했으면 적어도 가깝게 또 다른 이십세기 작가 울프라도 해서 자기 영역을 만들던가 했어야 한다, 그래야 밥벌이가 되지, 라고 누군가는 모순적으로 스스로의 지위까지 비꼬며 조언 비슷하게 해 준적이 있다. 문제는 그 말이 본인에게는 전혀 우습지도, 영리하게 들리지도 않았던 것. 제 영역의 부재. 이것은 본인을 끝없이 괴롭히는 동시에 본인을 가장 본인답게 하는 것 같기도 하다. 마조히스트적인 거만. 변태-
오늘 읽고 있는 Russell의 History of Western Philosophy 중에 이런 부분이 있었다:
When I say this, I am thinking of love as an emotion, not as a principle. As a principle, the Stoics preached universal love; this principle is found in Seneca and his successors, and probably was taken by them from earlier Stoics. The logic of the school led to doctrines which were softened by the humanity of its adherents, who were much better men than they would have been if they had been consistent. Kant- who resembles them - says that you must be kind to your brother, not because you are fond of him, but because the moral law enjoins kindness; I doubt, however, whether, in private life, he lived down to this precept.
엌정늬! 칸트는 실질적으로 평생 한 동네를 벗어나본 적이 없는 고집스런 은둔자가 아니었던가. 그러게 원리로서의 사랑과 감정으로서의 사랑은 참 다른데 말이다. 그 두 개가 일관되어야만 위선이 아니라면 감정이란 것은 결국 극복되어야하는 약점...일까나.
여튼 앞에서 좁은 의미의 사랑이라고 한 그런 것은 자발적임에 틀림없다. 본인도 자발적으로 그런 것을 하게 되기까지는 어쨌든 해야겠다는 의지라도 있어겠다고 느낀다. 내일이면 이것은 또 바뀔 수도 있지만, 전혀 모르는 가능성들로 출렁대는, 보다 큰 세계를 염두할 때, 자유로워 보이긴 하지만 사실 같잖지도 않은 본인의 손톱만한 세계에 갇혀 발톱만 내려다보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는, 어떤, 본인에게 무관심한 관점을 놓으면 안되겠다. 그러니, 그때까지, 마음아, 병들지마. 이미 들었으면 얼른 나아, 응.
빛을 쐬러 잠깐 집 앞에 나갔다오니 오늘따라 동네 까페에 싱숭생숭 앉아있는 여인네들이 부쩍 많다. 그들이 흥미로워할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기사: self-realization or resign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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