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7.2011

Speak Low

Jourdans Cottage
Paul Cézanne


'그런 제안은 좀 조용하고 젠틀하게 물어져야 하는 것 아닌가' 라고 생각했다면 이것 역시 다른 이 나름의 표현 방법을 포용하지 못하고 내 취향과 기호를 고집하고 있는 셈인가. (보통 내 취향은 허영으로 이르던가. 보통 취향은 허영의 냄새가 맞는가.) 그렇지 않으면 나는 소위 상식이라는 것을 준수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고 있는 비상식적으로 까다로운 여자인가.

어쩌다가 마주친 한 어려운 어르신에게, 흔하게 뿌려지는 연민을 넘어서 당장 오늘 안으로 해결해야 할 월세와 그 영혼의 구원까지 염려하는 그의 마음에 미약하나마 일조를 하며 경의를 표하면서도 여전히 내가 그의 판단력을 의뭉스러워 한다면. 말하는 내용은 옳을 수 있느나 '삐익- 삐익-'하는 소리가 신경을 바짝 곤두서게 하는 확성기를 든 듯 크고 거칠게 표현된 방법이 불편했다고 고백한다면. 이것은 우아하게 누워있는 신경들을 그 상태로 흔들림 없이 유지시켜주는 것이 마치 세계평화와 자유의 실현과 같은 수준의 가치로 여기는 어떤 뻔한 수준의 세력에 가담하는 것과 마찬가지인가. 나는 인간의 피가 난무하는 전쟁 중에도 다른 사람 눈에 비친 내 얼굴의 기름진 정도를 부던히 체크하며 기름종이를 아껴쓰는 데 온 집중을 쏟을, 맥락을 모르는 얄팍한 놈인가.

믿지는 않아도 이해할 수는 있다. 내 스스로의 능력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서도, 믿음직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애정을 품기도 한다. 그렇지만. 보기에도 몸가짐과 맘가짐이 매사에 방자하여 안하무인격인 사람과, 겉으로는 그렇게 보이지 않지만 잔꾀가 충만하고 눈치가 백단이라 쉽고 편리하게 남들을 잘도 치켜세우면서 속으로는 자기정의에 도취되어 남이 받을 칭찬까지 자신에게 죄다 퍼주고 있는 다소 복잡하게 거만한 사람에게서도, 어떤 절대적으로 아름답고 정의롭고 선하며 시간을 초월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가.

타고 나기를 잘 속는 사람이라 그다지 힘들이는 의지 없이도 옳다고 여겨지는 것을 더 잘, 의심없이, 자주 할 수 있는 것이라면? 곧 재현될 자기의 착한 행실에 미리 만취되어 두 엄지 손가락으로 스스로를 가리키며 제자리를 빙글빙글 돌면서 벌어진 실천이라면? 어떤 정의로운 일이 자발적으로 선택되어진 것이 아니라, 마지못해 엉거주춤 어쩌다 진행된 것이라면? 이 때에도 역시 액션이 최우선이며 가장 중요하다고 말해질 수 있는가.

왜 하필 그 어르신이어야 하는가. 나는 라면박스 종이를 이부자리 삼고 펴놓은 우산을 조명 가리개 삼아 맨발로 잔뜩 꼬부리고 자는 케케묵은 냄새의 삐쩍 마른 홈리스들을 매일 아침 광화문 지하도에서 마주쳐도 별 동정심의 표현 없이 지나다니는데.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아마도 앞으로 그럴 것이 거의 확실한 이 어르신을 가리키며 아는 사람이 보이지도 않는 곳에서 메가폰을 들자 기다렸다는 듯이 벌떡 반응하는 것에 메스꺼운 위선의 냄새를 맡는 것이다.

왜 나는 의심하는가. 남들은 그러지 않을 동안에. 약아빠져서, 세상 물정에 밝아서, 타인에 대한 컴패션이 모자라서? 혹은 어느 새 내가 스스로 쉽게 빠질 수 있음을 미리 가늠했기에 그렇게 두려워하던, 자기 자신을 제외하고서는 대략 모든 것에 대해 비웃을 줄 아는 것이 무슨 대단한 힘 인 양 행세하는 냉소주의자들 중 하나가 되어버렸던가. 아 이 끝없이 치이는 고달픔. sentimentalism과 cynicism. 둘 다로부터의 적절한 경계. 하긴, 이런 것 쯤에서 가장 쉽고 편리하게 자유할 수 있는 방법이 있긴 하다. 앞의 둘을 구별하여 인식하는 것을, 혹은 인식한다고 스스로 인정하는 일말의 확신을 지우는 것이다. '행복한 돼지'라는 개념에 설득되기만 할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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