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9.2013

Dear Reader,

from Kinfolk

조악하게 풀어놓은 저의 일상과 두서없는 소리에 공감해주시고 가끔씩 이렇게 찾아와 주셔서 고맙습니다. 저는 하루의 기록을 조금씩 남기고 있으나 아마 당분간 이 곳은 뜸할 것 같습니다. 다른 공간이 생겼고, 손에 잡히는 하루의 시간이 아주 많지는 않은 관계로 한 곳에 집중하려고 합니다. 저 역시 이곳은 가끔씩 기억하고 찾아오겠습니다.  이를테면 오늘처럼 이렇게 무한반복으로 들을만한 좋은 음악을 발견했을 때 말이지요.

Tony Paeleman_Landscape



11.12.2013

ode to lemon ginger tea

photo by Brian Ferry

지금 당장 이마트에 가시면 각종 차와 커피, 코코아 등등이 있는 코너에, D 회사에서 나온 "아가베레몬생강차"라고 써있는 조그만 병을 발견하실 수 있으실 겁니다. 호주머니에 칠천원 정도 갖고 계시다면 겨우내 스타벅스 아메리카노 두 잔정도 포기하시고 이것을 사십시오. 이 병을 소중하게 가슴에 품고 집에 돌아와 차 포트에 물을 올려놓으십시오. 커터로 비닐 껍질을 벗기고, 뚜껑을 잘 열어 보십시오. 잘 안되면 고무장갑을 끼고 차분히 시도해 보십시오. 펑 소리는 나지 않습니다. 가장 애착이 가는 머그잔을 꺼내 다섯 티스푼 정도 내용물을 덜어내십시오. 물이 다 끓었으면 머그잔에 알맞게 따라내고 기대에 찬 마음으로 천천히 잘 저어주십시오. 10초 정도, 서두르지 않게 뜸을 들이고 이제 호- 불면서 그 맛을 음미해보십시오.
...
여기까지 하셨으면
당신은 제가 괜찮은 사람, 믿을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될 지도 모릅니다.

* 기호에 따라 주변에 주황색 불빛의 미니 전기스토브, 혹은 초를 켜놓거나 평소 좋아하는 작가의 아직 읽지않은 단편 소설이나, 좋아하는 화풍의 그림책, 어느 때 들어도 잘 질리지 않는 음악과 곁들이면 더욱 좋습니다.

* 만약 이걸 오늘 저녁 즈음에 하실 수 있으시다면, 그러시는 중에 제가 숨쉬고 있는 대한민국 서울시 마포구 쪽을 향해 긍정의 끄덕임을 한 번 해주십시오. 제가 이런 걸 널리 알려드릴려고 태어난 건 아니지만, 앞으로도 제가 쭉 있는지 없는지 모르게 살아도, 이런 게 있다는 것을 상기시켜드리는 것보다 아무쪼록 더 영양가있고 의미있는 인생을 살도록 애써보려고 합니다. 오늘은 제가 이 세상에 태어난 날입니다.      

11.11.2013

learn to take it day by day

photo by Marcus Møller Bitsch 

씨리얼을 후루룩 마시듯 한 다음, 크고 빨간 사과를 먹으면서 Alice Munro의 단편을 하나 읽다가 다시 졸음이 와 스르륵 또 누워자다 일어나 보니 열한시가 좀 넘었다. 올해 1월 그녀의 Dear Life를 번역해 보겠다고, 문학한다는 출판사 다섯 군데에 관심이 있으실지 물어봤었다. 그녀의 작품에는 관심이 없다거나 출판 계획들이 밀려있어 당분간은 새로운 번역작은 의뢰하지 않을 거라는 게 그들의 답변이었다. 그녀의 노벨상 수상 후로 어디서 번역을 진행하고 있을지 궁금해 검색을 해보니 물어봤던 출판사들 중 하나가 다음 달 출판한다고 예약 판매하고 있더라. 예약 판매라니. 뭐 그리들 서두르시는가. 번역을 맡은 누구씨는 누군지 모르겠지만 급히 하느라 정신 없으시리라. 그 출판사 에디터님께서는 올해초 본인과 그런 이메일이 오고간 내용을 기억하지도 못하시겠지. 

지난 주 금요일엔 수업 15분 전 갑자기 뷁하고 변덕인지 영감인지 모르는게 오셔서, 아이들과 위험하다 싶을 정도로 간추린 버전의 Moby-Dick과 The Lord of the Flies를 두 시간에 걸쳐 읽었는데 반응이 예상보다 좋아서 기뻤다. 그런 것도 내 맘대로 할 수 있겠구나 싶었다. 자유가 도처에 널려있다.  

11.08.2013

x-ray

John Register

두 달간 미뤄왔던 <정형외과 가서 손가락 엑스레이 찍기>를 드디어 해내었다.

나는 타인의 기대에 열심히 부응해보고자 그들끼리 지칭하는 <회식>자리에 따라나선 것이었다. 그러다 그 중 한 분이 고기는 잘 안드시고, 물 같이 생긴 작은 잔을 연거푸 들어마셔 순식간에 무슨 일이 일어나버린 것처럼 되버리고 만 상황이었다. 화장실에 가겠다는 그녀가 어쩐지 위태위태해보여 같이 일어났는데, 그녀는 예상대로 목적지를 향해 가지질 않고 비틀비틀 차도쪽으로 비껴나갔다. 나는 몸의 방향을 바꿔주려던 의도였을 뿐이고 그녀는 혼자서도 잘할 수 있다는 걸 표현하려고 했었을 뿐이겠다.  혼자서도 괜찮다고 나를 살짝 밀쳤을 뿐이었을 텐데 하필이면 그녀의 몸집이 나보다 컸던 터라, 이 몸은 그대로 균형을 잃고 아스팔트 도로 위를 살짝 날다시피했지만 실제로 날지는 못해 오른 쪽 무릎과 오른 손가락 들을 중심으로 대충 팽개쳐진 것이었다.

무릎에서 피를 많이 흘렸고 딱지가 완전히 앉고 떼어지는 데 6주 정도가 걸렸다. 그리고 여간해선 없어지지 않을 것 같은 검보라색 흉터가 생겼다. 오른 손가락 3,4,5번이 삐그덕대며, 통증인지 불편한건지 분간이 애매한 아릿아릿함이 그간 계속 있어왔다. 그렇지만 심하게 붓거나 했던 것도 아니니 뼈가 부러진 건 아닌 것 같다는 판단 하에 병원에 가는 걸 계속 미뤄왔다가. 오늘 아침에 눈을 뜨며 느껴진 첫 감각이, <손가락이 아프다>는 거였기 때문에. 평소보다 조금 부지런을 떨어 밖에 나가 병원으로 걸었다.

<큰 이상은 없고 그냥 삔 것>이 의사 선생님의 총평이다.

내가 넘어져서. 상처가 나서. 흉터가 남아서. 손가락이 삐그덕거려서. 이 사건에 얽힌 그녀가 <기억에 남을만한 인물>이 된 것도 틀리진 않지만. 그런 것 보다 더 깊이 내 머릿속에 들어와 박힌 건, 그 모든 게 일어나기 2분 전, 고기를 구우면서 원치않게 들었던 <말>들이다. 나는 그런 것들을 들어버려서 내딴의, 이웃을 둥글게 사랑하고 싶은 노력에 차질이 빚어지는 게 싫었다. 어디 뭐든 내 맘 편해지라고 바깥 일이 그렇게 되는가 말이다. 들이마시면 취하게 되있고 나온 말은 이미 누군가의 귀에 들어가 어떤 식으로든 소화되어 삼켜지게 되어있다. 나는 몸은 피곤했지만 정신은 멀쩡히 듣는 중이었기 때문에 그 순간 만큼은 그것이 쌍방향으로 일어나지 않은 것이 유감이다.

요는, 타인의 기대에는 여러가지가 있으니 부응하고자 하는 기대는 스스로 선택해야겠다는, 그런, 또 들으면 당연한 얘기입니다. <아니오>의 섭섭함을 안겨주는 불편함은 찰나이고 흉터는 왠만하면 오래간다는, 그런, 또 뻔하지만 맞는 것 같은 얘기지요.

11.07.2013

sung words/ linguistic music



What do fireflies sound like?
: "*"
완벽한 침묵을 배경으로. 정확히 말이라고 할 순 없는 언어적 소리,
음악같은 말, 심상 이미지를 외부로 전달하기 위한 음성적 노력, 음악적 제스쳐.
알고보면 이다지도 경계가 모호한 신기한 말 음악 이미지 놀이. 시간하고 놀아나기.

All in the flow. Omissions are not accidental.

Radiolab은 C가 K에게 강제 추천하고 이어서 K가 내게 적극 추천해준 포드캐스트인데 컨텐츠도 그렇지만 말과 그밖의 소리들이 빚어내는 향연에 나도 덩달아 팬이 된지 꽤 되었다. 그렇지만 K와 소원해진지는 세 달 정도 되었다. 그렇다고 본인이 이렇게 저렇게 뭐를 하기엔 좀 그런 것들 중에 하나다.

mrkrgnao.

11.06.2013

creative principle

John Register

There's no such thing as bad light.
It's all good.


11.05.2013

on repetition

by Trevor Triano

평범한 생활인입니다. 때로는 여러가지로 이루어지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뻔한 것들로 이루어진 것이 저의 생활입니다. 평범한 생활을 영위하고 있다는 것에 큰 스트레스는 없습니다. 가끔은 속박되었다는 느낌이 들어 괴롭히기도 하지만, 해가 갈 수록 이런 현실 생활은 그럴만 하다, 말이 된다, 오히려 다행이다라는 생각이 점점 잦아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좋게 포장하면 두 발을 땅에 똑바로 딛고, 어떻게, 어느 지점에서 타협할 것인가를 조금씩 배워가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꼭 그런것만도 아닙니다.

이를테면 오전에 이렇게 침대에 가로로 눕듯 앉아, 새로운 것과 오래된 것을 모두 들춰보며 하루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지 생각해 볼 수 있는 정신적 여유는 정말 괜찮습니다. 이건 생활에 대처하는 나름의 자세에 영감을 주고, 매일 똑같은 듯 하지만 사실은 매일 조금씩 다른 일이 일어나고 있는 일터에서의 시간에도 미리 생산자와 사회인으로서의 의미를 부여하게 되고, 퇴근 후에 다시 돌아오게 되는 주황 불빛의 조용한 시간을 기대하게 합니다.

뜬구름 잡는 얘기가 될 수 있으나, 어쨌든 통제와 안정, 혹은 현상유지에의 강박적인 추구에서 벗어나, 되도록 다른 것을 자유롭게 선택하면 좋겠습니다. 어디로부터 벗어나서 그것으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것과, 그런 것과 상관없이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것에는 또 차이가 있습니다.  from 과 to 의 차이이기도 하지만 범위의 차이기도 합니다. 끝을 미리 인지 하는데에서 오는 나태함과 무기력, 포기를 연상시키는 최면같은 반복보다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같은 급진적 집념과 불굴에의 반복은 하기에 따라 멋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그건 그렇고 어제 저녁 정자동 마드모아젤에게서 부재중 전화가 걸려왔는데 알고보니 그녀의 웨딩 때 내가 피아노를 연주하지 않아도 된다는 내용이다. 예식장 측의 멋진 현악 3중주와 그에 딸린 피아니스트에게 부탁했다는. 그래가지고. 부탁에 응하기 전 망설임과 지난 몇 주간 선곡한 곡들에 대한 연습은 별 소용이 없게 됐으나 전 우주적으로 볼 때 더 잘된 일이겠거니 싶다. 그녀의 말 그대로에 철썩 순종하여 '맘 편하게' 앉아 축하하고 올테다. 끄덕.

11.04.2013

november



나는 마시는 차 말고 굴러다니는 차 같은 거에는 영 관심이 없지만 올 9, 10월에 바쁜 시간을 쪼개 만났던 꼬맹이의 꿈이 자동차 디자이너였다. 그래서 저런 미니 모형들을 몇 백개를 수집했던 모양인데, 꼬맹이의 관심사에 내가 약간의 관심을 보이며 조금 구체적으로 질문을 던지자 자랑하듯 모형을 늘어놓으며 그 자동차들의 이름과 년도와 디자이너의 이름을 알려주었었다. "쌈바"라고 불리는 듯한 저 버스 비스무리하게 생긴 자동차가 귀엽다고 하자 서슴없이 가지라고 내주었다. 그 뒤로 몇 번 만날때마다 저렇게 조금씩 주어 늘어나게 되었다. 어쨌거나 꼬맹이가 가고 싶은 학교에 들어가게 되면서 우리가 애초에 만났던 목적 비슷한 걸 이루게 되어 다행이지만 무엇보다 꼬맹이가 그 순수한 열정을 오래도록 변함없이 간직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올해 6, 7, 8월 즈음 그런 꼬맹이들 둘을 더 만났었고 내가 도움이 됐으면 얼마나 됐겠느냐마는 모두 총명한 아이들이었던 터라 속 시원히 원하는 학교에 들어갔다. 이 아이들은 고작해야 열 셋, 열 넷인데 십 년 후 이들 앞에 펼쳐질 세상을 나는 지금 가늠해 볼 수도 없다. 나의 십 년 후, 40대의 내 모습을 가늠해 볼 수 없는 것과는 또 다른 성질의 예측불가함이다.

11월인데, 어쩐지 벌써 올해가 마감되는 기분이다. 여러 상황적으로. 엊그제 나는 공식적으로는 올해에 있을 모든 번역 작업을 끝냈다. 세어보니 올해 모두 9작품을 번역했고 16개의 단막극을 번역했다. 아쉽게도 올 해 원하는 만큼 원하는 책들을 볼 수 있는 시간은 없었지만 다다음 주 즈음이면 믿거나 말거나, 딱히 재밌다고 할 수 없는 문제들로 빽뺵한 수험서 29권을 8개월간 모두 착실하게 정독한 셈이다. 그 기능을 떠나 그냥 숫자의 볼륨에서 어느 정도의 "마냥 논 건 아니라는" 안도감을 느끼기에는, 실제로 그것들을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들을 투척했고 그게 완전한 낭비가 아니었다는 것을 본인이 알고 있으니 누가 뭐라해도 괜찮다.

그것도 그렇고 그냥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 문을 두드렸던 것이 있었는데 그것이 엊그제 밤 허락되었고 나는 잘하면 내년 봄이나 초여름 즈음 한 달 정도 영국에 있을 수 있겠다. 그 때까지 돈을 좀 모으고 마음이 변하지 않는다면.        

정자동 마드모아젤이라고 불렸던 그녀가 다다음주면 정자동 새댁이 된다. 아무래도 마드모아젤은 내가 피아노를 어느 정도 치는지 잘 모르고 반주를 부탁한 것 같으나, 나는 최소한 모두가 축하하는 분위기를 망쳐서는 안되겠다. 직접 고른 곡들을 홍대 Kinko's에 가져가 한 권으로 제본하는 계획이 생각처럼 간단하게 해결되지 않아 애를 좀 먹었으나 별 건 아니다. 그나저나 축가를 부르신다는 선배님이 무슨 곡을 부르시는지 아직 악보를 보내시지 않아, 이건 좀 당황스럽다.

한편, 프레이즈 팀에는 첫 모임에 출석해서, 좋다, 새롭다, 좋다!를 연발해서 감탄해 놓고는 그 다음부터 연속으로 몇 주를 계속 못나가고 있어, 이거 나 모르게 내가 짤린거 아닐까 좀 마음이 쓰인다. 그건 진심이었는데.

상수 어디즈음에서 길을 잃고 우연히 들어갔던 곳을, 일 주일 뒤 일부러 길을 잃어보자는 맘을 먹고 샅샅이 뒤지는 건 고단한 일이다. 맘을 먹으면 길이 안잃어지고(?) 어쩌다 보였던 그 식당은 맘을 먹은 눈에는 보이지가 않는다.

곧 다시 바빠지기 전 테누토로, 느리고 진득하고 의미심장하게 보냈던 지난 주말이었다.

11.03.2013

a new project


나는 새로운 프로젝트를 시작한다. 그것이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이고 얼마나 지속될 수 있을 것인가는 상관없이 나는 오늘 소녀처럼 두근댔고 기대됐고 아무 한 일 없이 벌써부터 뿌듯하다. 이 프로젝트는 이를테면 "성숙"과 "순수"의 공존을 동경함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조금씩 실현하거나 지향하고 싶은 마음, 아니면 그 비슷한 것에서 잉태되었을텐데. 이런 생각이 서로 다른 두 사람의 마음을 통하게 하는 것이 기적적으로 느껴졌다. 꼭 이 신나고 (그들한테는) 멋진 프로젝트가 아니더라도 오늘은 그들만의 스토리가 있는 기념비적인 날이다. 저 책상 위에 있는 이 사진 속의 것들이, 이 모든게 진행형이라는 것을 증명하는데도 신기해 죽겠다. 

난 저기 잘보면 보이는 나처럼 머리를 다시 빨리 기르고 싶어졌고 김칫국을 연상하는 각오같은 건 최대한 좌중하려고 하지만, 어떤 태도같은 것이 조금 달라졌다고 느낀다. 무시무시하게 아름답고 중요하고 가장 원천적인 것을 더 자주 기억하게 될테다. 어거지로 말고.

(고맙습니다, JH)

그 때 내가 지금처럼 기록을 뜸하게 남겼었다면, 아예 남기지 않았었더라면 어쩔뻔했는가. 2년 전 광화문 스타벅스 3층의 그 자리는 오늘의 그것처럼 그렇게 특별했었다. 

10.27.2013

becky shaw


나는 감기몸살에 옴팡 걸려 어제 오후 두시 반정도부터 드러누웠다. 오후 7시 반쯤 일어나 White Box에 갔다가 11시 쯤 돌아와 다시 바로 침대에 누웠다. 오늘 오후 두시 즈음까지 계속 누워 자다 깨면 빅 뱅 띠어리와 더 굿 와이프를 번갈아 보았다. 이렇게 가책없이 오랜동안 누워서 아무것도 안하고 원하는 만큼 미드를 볼 수 있는 기회는 최소 10개월만에 처음이다. 깨는 중간중간 계속 약을 밀어넣었더니 지금은 많이 괜찮아졌다.

Becky Shaw의 마지막 공연이 있었다. 난 6번째 보는 거라 대사들도 왠만큼 다 외우고 굳이 열심히 듣고 있지 않아도 손가락이 알아서 리드미컬하게 자막을 넘긴다. 자꾸 반복해서 보는 공연이 아예 지루하지 않다고 한다면 거짓말이고 그나마 배우들이 매번 한 두 명씩 바뀌고 중간중간 까먹는 대사들에도 변화가 있고 무엇보다 매번 관객의 호응이 드라마틱하게 다르니 어떤 날 공연이 어떤 다른 날 공연과 같다고 말하는 건 심한 무리다. 오늘은 어느 대학교 영문학도들처럼 생긴 학생들이 단체로 관람을 하러와 반 정도 자리를 채웠다. 이 연극에 대해 페이퍼를 쓰면 크레딧을 주겠다고 했는지 학생들이 중간중간 노트하는데 열심이었다. 난 사실 몇몇 바뀌는 배우 중 앤드류 역할에 선호하는 배우가 있어 대미는 그가 장식했으면 했는데 그렇게 안되어 조금 섭섭했다. PTC가 다음 달 작품을 마지막으로 한국을 떠나기로 한 결정에 대해서 나는 아직도 먹먹하다. 오늘 공연이 끝나고도 난 여느 때와 같이 뒤도 안돌아보고 횅 나왔지만 마음만은 그러하지 않다. 순전히 아직은 내 마음을 알아주지 않아도 괜찮음에서이다.

컨디션이 꽤 괜찮아 집으로 바로 들어가지 않고 옆 동네 "무대륙"에서 한다는 여기에 갔다왔다. 간단히 메모해 놓은 약도를 참고해서 슬렁 슬렁 걷다보니 어느새 찾는 곳이 마당에 펼쳐져 있었다. 두리번 두리번한 발걸음이 었으나 둘러보다 보니 어느새 컬쳐 앤 라이프매거진 한 권, 그래픽 디자인 잡지 한권, 이 앞의 두 잡지군에 종속되기에는 말이 다소 많고 깊이도 좀 그렇지 않겠는가 추정되는 domino 4호, 옆서 한 세트, 스티커 한 세트, 색칠 공부 그림 한 세트, 스텐실 그림 한 장을 한 쪽 팔에 전부 다 거머쥐고 있었다. 수 십개의 부스가 있었던 것 같은데 대부분의 컨텐츠는 "이국적"으로 보이는 사진과 함께 지극히 개인적인 생활에 대해서 끄적이거나 지극히 개인적인 생활을 시의 형식으로 풀었다거나, 일반적인 미적 기준에 상관없이 소신 있게 그렸으니 "진정성"으로 어필하겠다는 일러스트레이션 관련 옆서, 노트, 수첩, 서적, 에코백이 정신없이 많았다. 난 그들이 표현하거나, 표현하고자 했으나 잘 안됐거나, 아니면 어쩌다 어떨결에 표현된 각자의 모든 개성을 존중하고 싶다. 그것만이 다는 아니지만. 적지 않은 계산을 치루고 슬렁슬렁 걸어 합정 상수 어디쯤의 딱 보기만 해도 잘할 것 처럼 보이는 식당에 들어갔다. 갈비탕을 폭발적으로 맛있게 먹고 집에 돌아와 씻고 다시 침대에 쏙 들어와 있다.



방은 아찔할정도로 엉망진창이고 다음 주 수업 준비는 하나도 안돼있고 번역 거리는 그제 멈춘 데서 그대로다. 그래도. 난 아팠으니까라는 구실이다. 하나 안한게 더 있는데 그건 안써야지.

10.14.2013

mundane monday


오늘도 여기에. 출석을 찍었지만. 내리찧는 공사판 소리에 여섯시간 반밖에 못잔게 화딱지가 나. 여기 앉아 신수동 주민센터에 전화를 걸어 민원을 넣었다. 시끄러워 아침에 집에 있을 수가 없습니다. 또 하나가 올라가는 데 그렇다면 3개월을 또 견뎌야 한단 말입니까.

정확히 일주일을 미뤄왔던 이메일을 보내고 거의 삼 주만의 번역이자 PTC의 서울 마지막 쇼가 될 Race 작업을 시작했다는데 이번 주 월요일 오전의 의미가 있겠다.

제본할 악보가 몇 개 있고, 빨리 써서 아이디어 주머니와 함께 부쳐야 하는 손글씨 편지가 있고, 출력해야 할 기사가 하나 있고, 안좋아지기 전에 어떻게든 보기좋고 맛좋게 써먹어야 하는 재료들이 냉장고에 있고, 정해진 시간동안 한군데 앉아있어야 하는 책임이 있다. 지금 간다.

10.12.2013

ennui


이건 뭐지. 바깥 어디엔가 시선을 던져두고 적절한 느낌을 찾는다. 딱히 마땅한 단어가 없다. '안중요'나 '불필요'도 아니고 '뻔함'이나 '무가치', '무기대'도 아니다. '권태'가 그나마 나을 듯 싶다.

집 바로 뒤 건물이 거의 두 달에 걸쳐 올려지자 마자 집 대각선 뒤 건물 역시 하루만에 부서지고 다시 쌓고 있는 통에 시끄러워 아침 잠을 계속 못자고 있다. 그것을 구실 삼아서나 다른 이유에서나 며칠 째 연속으로 이 까페에 와 아침을 해결하고 이런저런 잡다한 일들을 하고 있지만.

그러게. 나는 어느 순간 시시해져 그만둬버린 리빙 라이프도 AA 모임에 나가는 정신으로 아침마다 요즘 꼬박꼬박 읽고 있는데. 매사에 얕잡아보는 어리석은 짓을 경계하고, 효과나 의미가 없을 것 같은 것들을 되도록 빈정신으로 어쨌든 성실하게 해보려는 중인데.예매해 놓은 영화를 보러가기도 귀찮고.


8.08.2013

I cook


왠만하면 해먹는다. 싱싱하고 신선하고 좋은 재료에 대해 점점 의식이 생기면서 온 불편함이다. 왠만한 식당 주방에서 무슨 일이 어떻게 일어나고 있는지 모르겠는데에, 냉소에서 유발된 의심이 한층 더 쌓이면서 점점 변형되온 생활 패턴이다. 이제 내가 하는 요리에 왠만큼 입맛도 고정되어, 값비싸고 제대로 하는 식당이나 한 메뉴만을 몇 세대 파온 전문점 말고는 내가 한 음식이 낫다는 생각이다. 이 동네에도 여러 식품점이 있지만 재료의 종류나 싱싱함에 있어 옆동네 이마트만은 못해 일주일에 한번씩은 장을 봐 냉장고를 채워넣는다. 일부러 나가는 건 아니고 적어도 일주일에 두 번 이상은 이 동네를 벗어나야 하는 스케쥴이 생겨서 돌아올 때 들러 사오게 되니 별 짐도 아니다. 요리에 임하는 불필요한 각오나 법석도 많이 줄어 이제 날치알 크림 파스타 정도는 15분이면 한 차림 만들어낸다. 특히 밖에서 먹는 한식 밥은 거의 재미없는 흰밥이나 묵힌 밥일 경우가 많아 아깝다는 생각이다. 한달에 한번 정도 찾아주시는 엄마는 볼 때마다 말라가는 것 같다고 괜히 걱정이지만 난 보기보다 많이, 잘도 먹는다.

Seoul Players에서 9월에 있을 10 Minute Plays를 위해 한 2, 3 주 전부터 번역 작업을 해오고 있었는데 예상 외로, 당최 이딴 걸 작업해서 뭐하나, 하는 회의가 밀려오게 하는 작품들이 꽤 여럿 있어 작업 중 한숨을 많이 쉬고 있다. 특히 가장 최근 번역한 두 작품이 더욱 그랬어서 작업 속도가 꽤 더뎌졌던 중 오늘 아침 그걸 끝냈다. 특히 뭔가 포스트모던해야 한다는 걸 의식하며 쓴 것이나 스마트하게 보이고 싶다는 작가의 숨겨진 의식이 감지되는 것들은 정말 하기 싫다. 엊그제 C가 부탁한 경제 관련 기사같은 걸 번역하느라 어제 몇시간을 썼는데, '라인들 사이에 뭔가 숨겨진 의미가 있진 않을까' 아니면 '이런 단어가 슬랭으로 뭐 다른 의미가 있나' 걱정하며 어번 딕셔너리를 뒤져보지 않아도 되어서 편하고 그런 두 번 생각해볼 것 없는 명쾌한 문장들과 단어 사용은 오랜만이라 새로웠다.

엊그제 퇴근 후에 아트레온에서 The Place Beyond the Pines를 K와 같이 가서 봤다. 난 Ryan Gosling과 Bradley Cooper에 대해 별 감정 없기 때문에 - 아, 'Silver Linings'에서의 Bradley Cooper는 분명 빛났다고 생각했지만 - 적어도 이 영화에 있어서 만큼 그들의 연기는 출중했다고 평했는데 K는 워낙 이 배우들을 별로라 한다. 영화 초반이 필요 이상 길었다는데에 동의하지만 충분히 예상 가능하면서도 너무 진부하지 않은 플롯이나, 어울리지 않는 듯 어울리는 Arvo Pärt의 사운드 트랙 등, 늦은 시간에도 불구, 볼만한 가치가 있었던 영화였다.

내 공간이 나한텐 완벽에 가까운 게 맞지만 블루투스가 되는 스피커를 하나 새로 놓으면 더 좋겠다 싶다. 신촌 프리스비에서 봐둔게 있긴 했는데, 일하러 가는 길에 하이마트를 들러보자.

8.06.2013

But then


어떤 의미에서 게을러 진 것도 맞지만 더 맞게는 말을 다루는 방법을 많이 잊어버렸기 때문이다. 문장을 써내기가 어렵고 이따금씩 굵직한 단어들이 생각났다가 곧이어 사라진다. 일단 써야지만 생각이 이어지는 불편함이 있는 사람이라 생각들이 줄창 점만 찍고 있지 선이 되는 경우가 드물다. 이런게 쌓이다 보면 어느 순간 걷잡을 수 없는 답답함이 치밀어 오른다.

창가 옆에 그럴 듯한 작업 공간을 새로 마련했다. 안그래도 내 공간은 위험할 정도로 많이 좋아해 스스로 문제 삼을까 하는데, 이건. 아찔하다. 도통 밖에 나갈 생각을 안한다. 특히 이런 흐린 날에 이렇게 창가에 딱 붙어, 세상에서 가장 편한 자세로 앉아, 좋아하는 음악과 바깥의 흰색 소음을 배경삼아 키보드를 두드리는 작업을 하는 것이 나는 너무 좋다. 하늘은 한 두어 시간 전부터 부릉부릉 시동만 걸고 막상 비를 뿌리고 있진 않지만 이른 밤처럼 어둡고 여름은 습하고 에어콘 실외기 작업을 하는 인부들은 바깥에서 바쁘다. 어젠 어린 시절 생각이 나 일부러 진짜 향을 피우는 모기향을 사가지고 와 창가에 놓았다. 아직 샤워를 안했지만 나는 아침부터 살아있다고 느낀다. 이 모든걸 가능하게 하는, 매일 아침 전쟁을 치루지 않아도 되는 일을 가져서 나는 새삼 다시 감사하다.

사진은 지난 토요일 이태원의 우드스탁에서 찍은 것이다. 기대가 전혀 없어서였는지 몰라도 House of Cards 사운드트랙에 딱 어울릴만한 그런 칠 아웃이나 라운지, 일렉트로니카류에 가까운 록이어서 즐겁게 취했다. 그러다 라이브 음악과 House of Cards의 연상작용으로 생각나게 된 M에게 그자리에서 반가운 이메일을 보내고 반가운 답장을 받았다. 한국에서의 마지막 날, 작별 선물을 준비해주지 않아 내심 꺼려하며 깨끗하지 않은 녹사평 주변을 같이 걷다가 즉흥연주처럼 What the Book에 쑥 들어가 Infinite Jest 첫장에 젊음 (청춘이란 말이 어쩐지 이젠 쑥스럽다) 을 담아 선물해줬던 것은 정말 재밌고 뿌듯한 일이었다. 그 한 짐 되는 책을 들고 여러 국경을 넘어다니며 폴란드와 독일 사이 어디쯤 버스에서 마지막 장을 덮는 동안 무수한 일이 일어났다. 그것은 곧 책으로 쓰여질 모양이지만 나는 궁금하다. 여기 이 창가에 그대로 바짝 붙어 앉아 나는 궁금하다.

엊그제 일요일에는 <A Late Quartet>을 봤다. 미리 Y로부터 귀뜀을 받아 마지막 씬에 대해서는 각오 비스무리한 걸 하고 있었지만 그렇지 않아도 나는 여러 랜덤해 보이는 장면에서 울었다. 괜히 운 건 아니고 이유가 있을 텐데 그 얘기를 좀 쓰고 싶지만 나는 이제 일어나 샤워해야 할 책임이 있다. 그건 여러면에서 다행스럽기도 하다.

7.22.2013

Haircut


부끄러운 얘기지만 미용실에서 헤어 디자이너가 머리를 만져주는 동안 나는 아직도 거울을 똑바로 보지 못한다. 어쨌든 고개는 반듯하게 들고 있어야 하기 때문에 꼿꼿이 앉은채로 눈을 질끈 감고 자는 척을 한다. 원래 짧은 머리였는데 남은 머리보다 잘라낸 머리가 더 많을만큼 짧게 잘랐다. 헤어 디자이너께서는 특히 남자들과 엄마가 좋아하지 않을거라면서 연신 우려를 표했다. 나는 엄마는 멀리 사시고 봐줄 만한 남자들도 없어서 괜찮다고 연신 안심을 주었다.

어제 오후 쇼에 W와 그녀의 친구들, 그리고 A와 C와 K과 모두 와주었다. 공연 후에 우리는 저녁을 먹으러 녹사평에 나갔는데 나는 2명 이상 사람들하고 어울리는 것이 너무 오랜만이라 티가 나게 어색했다. 그게 모두에게 불편함을 줬을까봐 좀 미안했다. 그들은 거의 3시간 동안 영화 얘기를 했는데 나 역시 화두에 오른 그 영화들을 대부분 다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언제쯤이 내가 말할 차례인지, 언제 추임새를 맞추고, 무슨 말이 적당한 말인지 등을 재며 그들의 아담스 애플이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만을 쳐다보고 있었다. 오랜만에 만난 자리에서 그렇게 잠자코만 앉아있는 나를 신경써주는 이들에게 "괜찮아. 내가 커뮤니케이션 감각을 좀 많이 잊어버린 것 같아"라고 필요이상 솔직하게 말하고 있었으니 얼마나 황당한 노릇인가.

꽤나 질서있게 사는 듯 해도 결정적인 때 우선순위를 헷갈려버리니 답답하기 그지 없다.

또 하나 불편했던 것은 어제 미용실에서 몇 시간을 앉아 있는 동안, 무슨 내용인지 중간에 놓쳐버리고 글자만 죽 따라 읽으면서 계속 책장을 넘기고 있는 본인을 발견했을 때. 여러번 그랬다. 그 때마다 느끼는 자기혐오 정도는 점점 위험해지고 있다.

혼자서도 잘해요가 아니라 혼자서만 잘한다(잘하는 줄 안다). 사람들과 섞이는 순간 모든 것은 다시 혼란스러워지고 내실의 발전은 전혀 보이질 않는다. 혼자 있는 건 너무 쉽다. 너무 쉬워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번 주를 특히 잘 살아내고 싶은 바람이 있다. 비가 철철 내리네.

7.20.2013

The Master


그래서 지난 수요일 마스터를 봤는데 그것에 대해 별로 할말이 없다. 왜 그럴까 생각해보려고 했는데 그것도 별로 내키지 않는다. 대충 느낌은 그렇다. 영화의 소재와 그냥 개인적 관심 영역이 멀어서인것. P. T. Anderson이 영화 잘 만드는 감독이라는 건 알겠다. Magnolia를 봤을 때의 충격도 어렴풋 기억나고 There Will Be Blood도 영화적으로 대단히 완성도 높은 작품이었다는 건 누구든 알아볼 만 했다. Philip Seymour Hoffman과 Joaquin Phoenix의 소름끼치게 리얼한 연기가 영화를 보는 동안에는 본인을 계속 스크린 속으로 빨아들였지만 캐릭터들 자체가 관찰하기 좀 불편한 인물들이라 영화를 '즐기기'에는 좀 한계가 있었던 듯하다. 이건 내가 가벼운 인간이라는 것을 보여주기도 하겠지만. 전쟁 전에 각 캐릭터들이 원래 어떠한 인물이었는지 좀 더 보여주셨더라면 더 동조가 되었을런지도 모른다. Tom Cruise가 이 영화를 보면 어떤 생각을 할지 궁금하다.

9월에 Minneapolis에서 C. S. Lewis 컨퍼런스가 있는데 잘하면 갈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지난 주부터 고민하고 있는데 고작 4일 머무르겠다고 이틀을 비행기에서 보내는 강행군에 그닥 자신은 없어 계속 맘이 바뀌고 있다. 일단 일터에는 얘기해 놓았는데 이 주내로 결정해야지.

Popcorn이 시작했다. 이번 주말과 다음주말 중 시간 되시는 분들 White Box Theatre로 오시라. 자막을 올리고 있을테니.

드디어 어제 몇 달간 들고 꼼지락 대던 David Foster Wallace의 The Broom of the System을 다 읽었다. 그러게 과연 Pynchonian, Joycean, Wittgensteinian이라는 형용사가 다 와서 붙을만 하다. (아 그런데 P. T. Anderson 감독의 다음 작품이 Pynchon의 Inherent Vice란다. 이런 포스트모던 작가들의 작품들을 영화화하는 건 어쩐지 불안하다. David Cronenberg가 영화화한 DeLillo의 Cosmopolitan을 아직 안본 것도 그런 이유에서 일거다.) 그렇지만 여기서 이어지는 여정의 모티브가 되시는 인물이 끝까지 나오지 않아 다소 실망이었다. 그, 목에 두꺼비를 달고 다니면서 다리를 저는 여자 이야기를 비롯해 여러 '이야기 속 이야기'가 대단 슬프면서도 웃기는 게 있어 읽는 동안 계속 Infinite Jest에 대한 향수를 일으켰다.

그에 이어 작년 여름부터 계속 손에 쥐었다 놓았다하고 있는 The Magic Mountain을 다시 집어들었다. 표지가 지겨워서라도 이번엔 마지막 장을 읽으리라. 이런 쓸데없는 고집.일까.

비가 한참 오다가 이제 매미가 운다.

7.11.2013

Lately


유감인 것은 친구와 5년 동안 사귀어온 여자친구가 다른 남자와 사랑에 빠진 것이다. 유감인 것은 그런 친구가 불러 나간 자리에서 보이는 대로 해석하고 별 감정없이, 어떤 흔들림이나 동요도 없이 앉아 있었음이다. 유감인 것은 하필이면 그 때 몸 상태가 별로라 "어떻게 이럴 수가 있냐"는 말의 여러가지 변형도 몇 시간 들어주지 못하고 빨리 자리를 떠야 했음이다. 유감인 것은 물론 남 얘기지만 그 남이 너무 멀리, 전혀 상관없는 사람처럼 여겨졌음이다. 이것은 벌써 일주일 전 얘기이다. 

다행인것은 걸어다닐 수 있는거리에 씨지비 무비꼴라쥬가 생겼음이다. 벌써 이 달에 Dans la Maison, Un Homme Qui Voulait Vivre Sa Vie, Poulet Aux Prunes를 다 보았다. 조만간 The Master와 A Late Quartet을 적당한 시간에 보려는 중이다. Dans La Maison은 오랜만의 프랑스아 오종 영화인데 실감이 나면서도 그렇지 못한 부분이 꽤 있어 기대에는 못 미쳤다. 아니면 원래 그의 영화가 그랬던가. 그의 전작들의 제목은 익숙한데 내용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두번째 영화는 사운드 트랙이 정말 좋았고 Romain Duris의 살떨리게 리얼한 연기가 극점이었다. 결말이 좀 흐지부지해서 그렇지 나쁘지 않았는데 생각보다 평점이 좋진 않더라. 마지막 영화는 영화 4/5까지는 이게 뭔가 싶다가 모든게 말이 되게 하는 독특한 구성이다. 참신했다.

Red Light Winter와 Popcorn의 번역을 끝냈다. 쉬는 날인 어제 집에 박혀 막바지 작업을 하다가 기똥찬 발견을 했는데 번역을 하는 동안에 쉽사리 피로해지지 않는 완벽한 자세가 바로 그것이다. 침대를 가로질러, 누운 것에 가깝게 앉아 창문이 난 벽에 베게를 놓고 등을 기대어 맥북을 다리에 올려놓고 작업을 하다보면 전혀 피곤해지지도 않고 왼쪽 귀 뒤 열린 창 밖으로 빗소리도 들리는데다가 왜그런지 음악도 더 의식적으로 골라 들으며 작업할 수 있다. 차가운 음료를 침대 옆에 놓고 마시면서 자꾸 생겨 떨어지는 물방울에 신경쓰지 않아도 되는 방법도 연구해서 발견해냈다. 그렇게 어제 생산적인 하루를 보내고 기분이 꽤 괜찮아 저녁 즈음 이마트에 나가 그린 채소들과 고기와 해물, 여러 종류의 음료들과 요구르트를 잔뜩 사다 냉장고에 정리해 넣고 교촌 치킨을 시켜 먹었다. 

위의 자세는 정말 물리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편안함을 주는 완벽한 자세인데 하나의 단점이 있다면 이렇게 하루를 쓰면 전혀 에너지를 소비한게 없어 새벽 두 시가 다 되어도 잠이 오지 않아 누워서도 한참동안 눈을 말똥거려야 한다는 것이다.

주의를 기울여 Esbjorn Svensson Trio 음반들을 다시 듣고 있는데 이 이상으로 더 음반이 없다는 게 새삼 너무 아쉽다. 누구 이 트리오랑 비슷한 뮤지션들 아시면 알려달라.

스타벅스 골드카드를 쓰다보면 꽤 자주 하나 더하기 하나 쿠폰이 들어오는데 그럴 때마다 애매해서 그냥 안쓰고 말았는데 어제부터는 하나 더하기 하나 쿠폰이 다른 사람하고 같이 가야지 쓸 수 있는 것이라는 편견을 버리기로 했다. 다른 한 개는 얼음을 빼고 포장해와서 냉장고에 집어넣었다. 씨지비에서도 이런 쿠폰을 꽤나 자주 나눠주는데 이건 편견의 영역에서 풀 수 있는 숙제는 아니다. 연인들끼리 보는 스윗박스 석의 편견을 깨부수고 혼자 옆으로 누워서 영화를 보고 싶은 날이 오지 않는 이상. 영화관 얘기가 다시 나와서 말인데, 기존의 영화관 좌석과 다르게, 인간의 골격 구조를 고려했음이 틀림없는 아트레온 좌석의 편안함은 가히 기립 박수를 보낼만하다. 

슬슬 2009년인가에 구입한 초창기 아이폰을 최신 기종으로 바꿔야할 때가 오는지 실행 버튼을 세 번은 눌러줘야 말을 알아듣는다. 전화도 잘되고 포드캐스트도 잘 다운로드하고 음악도 잘나오고 정도 들어 변심하긴 좀 껄끄럽지만, 마음의 준비를 해야겠다.

답장하고 싶은 이메일이 하나 있는데 왠지 자꾸 미뤄지고 있다. 오해가 없으면 좋겠다.

6.30.2013

The Orderly


아 그런데 오늘 공연은 정말 멋졌다. 친구들을 부르지 않은 것이 좀 후회되었을 정도로. 번역 몇 자 하고 자막 넘기는 내가 이렇게 뿌듯하니 직접 극쓰고 연기하고 펴내는 저들이 느끼는 느낌의 강도는 뭐 충격에 가깝지 않을까 싶다. 매우 일부러 한국적인 핸드메이드 땡큐 카드와 다음 작 번역의 영양분이 되어줄 샴페인 한 병에 대한 땡큐 이메일에 레전더리라는 형용사를 썼다.
내일이 마지막 쇼인데, 원래 그곳에 있어야 하는 나는 다른 묶여있는 일 관계로 없지만, 시간 되시는 분들 가보셔도 좋을 듯 싶습니다.

Evans


윗니가 시려 치과에 갔는데 윗니 두 개뿐 아니라 아랫니 두 개도 시린 중이란다. 다음 주에 한 번 더 그 길다란 의자에 누워 한 십오분간 집중해서 정신을 놓아 몸이 없는 정신인 척, 아니면 정신이 없는 몸인 척 하면 이 시린 고통도 지나가리라. 치과 유리창에 저렇게 영어로 "근데 그는 무서운 사람 아냐?" "포르투갈인 차는 좋아!"라는 맥락없는 두 문장이 박혀있었다. 그 뒤로 보이는 맥맥한 하늘 색깔과 딱히 짚어내어 표현하고 싶은게 없는 애매한 배경이 묘하게 시적이었다.


한창 바쁜 중 먹고 싶은걸 또렷하게 생각해내기다. 뭐가 먹고 싶은지 잘 모르겠는 데에서 홍대의 Burger B가 또렷해지기까지 는 지난주 삼계탕 이후로 약 삼일 걸렸다. 이틀을 벼르고 에반스에 가는 길에 걸터앉아 두 손 모두를 사용해 먹었다. 친구의 친구의 친구들 둘과 그 둘 중 한 명의 동생과 그 동생의 친구 한 명을 새로 만났다. 친구의 친구가 성기문씨의 내노라는 팬이라 그의 오스카 피터슨 트리뷰트 공연을 한 달 전부터 벼러왔고 나도 그 소식을 듣고 어떻게 하다보니 같이 벼러온 셈이 되어 우리는 잘 어울렸다.


카톡을 통해 이전에 성기문씨에게 Carla Bley의 Lawns의 아무때고 연주해달라고 신청한바 있는 그녀는 마침 오스카 피터슨 트리뷰트 공연인데, 전혀 관련 없어보이는 뉴욕 재즈의 왕언니 칼라 블레이와 어떻게든 연결고리를 만들어 연주해주고 부득이 자세하게 그 연결고리가 뭔지(: 잘 생각은 안나지만 아마 "칼라 블레이의 전전전 남편쯤 되는 Paul Bley가 캐나다 몬트리올 출신인데 오스카 피터슨도 그러하다"가 요지였던 것 같다) 설명해주신 이 재즈 피아니스트에게 감동백배하여 이 곡 연주가 끝나고 근처 집에 달려가 와인 한병을 가져와 바쳤다는, 인간미 넘치는 스토리가 있다.

공연 후에 최근 살이 좀 찐 친구 한명과,  친구로부터 "넌 젠체하는 영화를 좋아하니 이 사람하고 잘 놀거야"라고 강추받은 새로운 사람과 콜로라도의 절세미녀도 합세하여 우리는 어디엘 자리잡고 앉 았다. 나는 미숫가루를 마셨다. 그래가지고  다음날 아침 일과를 생각하고는 건전하게 일찍 나왔다.

6.28.2013

6.26.2013

Wednesdays


나는 보통 직장인 같지 않아 토요일에 잠깐 일하는 대신 수요일은 논다. 요즘 수요일의 낙이라 함은 점심 느즈막히 광화문의 천장이 높다란 파리 크라상에 가서 우적우적 빙수를 먹는 다든지 죽치고 앉아 번역이나 아이들 에세이를 고쳐주며 입이 궁금할 때마다 이것저것을 집어 먹는 재미이다. 바깥은 빛이 좋고 꽤 여러가지가 녹색이고 저 앞으로 분수들이 오르고 내리고 있어 집에 박혀 있으면 하기 어려운 여러가지 연상작용들이 다방면으로 가능하다. 요즘은 7월에 있을 Popcorn을 번역 중이다. 살도 조금 찌우는 겸 체력 보강을 위해 여름간 '낙 프로젝트'로 세운게 수요일 마다 고려삼계탕에 가 삼계탕을 먹는 거였는데 이 계획을 지난 주 금요일 세우고 오늘까지 참지 못해 일요일에 나와서 삼계탕을 흡입했더랬다.

또 하나 낙은 이렇게 앉아 있다 저쪽으로 조금 걸어가서 씨네큐브에 새로 걸린 영화들을 제법 사치스러우면서도 캐주얼하게 보는 재미이다. 지금 걸려 있는 오개 영화 중 네 개는 봤고 오늘은 Marie Krøyer를 볼거다. 트레일러를 봤는데 기대는 많이 없다.

낙은 또있는데 이 바로 지하층 교보문고에 내려가서 책표지를 구경하고 없는 책을 주문하고 예쁜 색 지브라 형광펜을 사는 즐거움이다. 최근에 Zadie Smith의 On Beauty를 읽었고 James Salter의 A Sport And A Pastime을 주문했다. 얼마전 그가 Guardian에서 읽어준 Lydia Davis의 Break It Down을 두 번이나 들었다. 멋진 단편이었다.

그리고 광화문에는 광화문수제비가 있다.

조금 아까 경찰들이 우르르 들어와서 본인은 죄가 많아 조금 두근했는데 알고 보니 그들도 먹으러 들어온 것이었다.

6.25.2013

Neil Cowley Trio



여러 의미에서의 몇 번의 죽음의 고비를 넘기고, 아니면 그대로 걸친채 나는 아직 살아있다.

여기 마지막으로 글을 쓴 게 채 일년이 안됐다니 놀랍다. 다시 서울 시민이 되었고, 당최 왜 그렇게 오래있었는지 이해가 안되는 전 직장을 그만두고 그나마 개인적으로 의미를 갖다붙일 수 있는 일을 한다. 몇 개의 극을 번역을 했고, 하고 있고, 자막을 올렸다. 항상 본인의 정신적 주소를 되짚게 하는 홍대와 녹사평 주변에서 주로 놀고 하지만 별로 놀 시간이 없다. 색칠 공부는 서울 시민이 되고부터는 한번도 할 기회가 없었고 건반하고는 그런대로 여전히 친하게 지내고 있다. 몇 권의 책을 읽었고, 시집도 꽤 읽었다. 바로 이 주 전쯤에 The Body Electric이라는 중고 하드커 버 책을 의미있게 받아들었고, 어제는 George Herbert 를 다시 집어들었다. 몇 사람이 지나갔다. 아일랜드로 떠났고, 보스톤으로 떠났고, 러시아와 독일을 거쳐 캐나다로 떠났다. 그냥 차를 타고 가다가 서다가 다시 간 사람도 몇 있었다. 러시아에서 온 손글씨 편지는 내용도 그렇지만 그것이 일단 내 손에 쥐어졌다함이 신기했다. 새로운 건 전보다 없다. 그렇지만일까 그래서일까 난 인생 통틀어 이보다 짧아본적 없는 머리를 하고 조금 말랐다.

어쩌다 4, 5년전 싸이월드에 쓴 노트를 보게됐는데 별로 귀엽지도 않고, 그렇다고 지금 변한게 있는 것 같지도 않다. 전보다 집중력이 더 짧아졌고, 대체적으로 더 심드렁해졌고, 알았던 걸 까먹고 오히려 이해한다고 믿는게 총체적으로 줄은 느낌이랄까. 순전히 시간이 많이 지났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여기에 링크해 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