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히 노동절을 기념해서 꺼내보겠다는 의도는 아니었지만 노동의 의미, 생산의 절차, 창작의 의도와 철학을 생각하게 하는 좋은 영화를 봤다. 단순히, 그러면 뭐하나, 매겨진 값을 빼고는 대다수의 소비자는 개의치 않는데, 일단 익숙해지고 당연하게 여겨지면 별 의미를 두지 않는 것이 순리인 듯 바쁘게들 사는데, 특정 제품에의 소유가 마치 저가 속한 사회 문화 생활 계층을 직간적접이고 자동적으로 증명한다는, 퍽이나 허술한 품위에의 위계질서가 바로 본인과 여러분이 만들어낸 것인데, 라고 할 것은 아니고. 영화는 보는 사람이 약간 불편할 만큼 겸손해서 영화가 끝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귀족적인 스타벅스에 가 샷 추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내놓으라는 본인에게, 그럴 자격도 이뤄낸 것도 없다는 것을 또 굳이 요목조목 짚어내며 죄책감을 옴팡 안겨주었다.
원래부터 그닥 잘생긴 얼굴은 아니었지만 요즘 거울을 볼 때마다 느끼는 것은 점점 안생겨져간다는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그런 현상에 대한 반응인데, 치, 더 안생겨져보리라, 도저히 참을 수 없어 어떻게 해야 겠다는 생각이 들 때까지 안생겨지게 놔두리라. 그러는 중에 어쩌면 본인의 안생김을 마음껏 스스로 놀릴 수 있는 넉살이라도 길러지면 그냥 마냥 놔두리라. 모두가 하나같이 인정하는 미인이 긴 생머리를 찰랑거리며 가까이에 앉아도 본인은 하품이나 하리라. 상호보완적이라면 좋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기어코 다른 종류의 아름다움을 믿으리라. (그러는 중에 도저히 참을 수 없어 어떻게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면, 그땐 그냥 어떻게든 해보리라.) 이런 건 내 평생 절친인 반항심이 재주를 부려 이른바 히스테릭한 노처녀의 마음을 닮아가는 것일까. 여하튼 이런 자세는 이 밖에도, 아무도 본인을 모를 때 더 무명이 되어버리리라, 평범도 안되면 아예 없는 것처럼 되어버리리라 같은 흥미로운 문장들을 짓는다. 그렇지만 이런 것이 전혀 통하지 않는 때가 있는데 그것은 곧 출근하기 싫다, 가 더 싫어져 보리라가 되지 않음이다. 이것은 불가능한데 이 때 반항심은 뷁, 그렇다면 그냥 출근하기 좋아버리지 뭐, 를 해보자고 제안을 하지만 그것 역시 불가능하다. 반항이 요렇게 조렇게 아무리 창의적으로 재주를 넘어봐도 어떻게 손쓸 수가 없는 명백한 한계이다.
나는 위 사진을 찍은 자리에서 거의 오후 대부분을 보내며 커피를 한 모금 마신다음 입안에 넣은 브라우니는 맛에 별 변화가 없지만 브라우니를 한 입 먹은 다음의 커피 한 모금은 더 맛있다는, 별 시덥지 않지만 어쨌든 새로운 느낌을 발견하는 업적을 이뤄냈다.
집. 한참 사용하지 않은(을?) 크리에이티비티를 모조리 불살라 황당하고 혁신적인 샐러드 소스를 만들어 숙제인 양 성실하게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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